가축 살처분 참여자 70%가 심리적 외상으로 트라우마 겪는다

국가인권위·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분석..국가적 폭력으로 인한 트라우마, 대응은 `각개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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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축 살처분 참여자의 70% 이상이 심리적 외상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정신적·육체적 검사나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는 14%에 그쳤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소장 김석호)가 실시한 ‘가축매몰(살처분) 참여자 트라우마 현황 실태조사’의 분석 결과다.

연구소는 6일 서울대 종합연구동에서 최종보고회를 열고 연구 결과 일부를 발표했다. 이날 보고회에서는 트라우마로 이어진 살처분 과정의 문제점과 국가적 대응체계 마련 필요성이 도마에 올랐다.

본 연구의 책임연구원을 맡은 김석호 소장은 “그동안 사회적 관심에서 배제됐던 방역과정 참여자들의 정신적 고통, 트라우마에 대한 경험적 자료를 모아 분석했다”며 “향후 보다 전면적인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고 전했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김석호 소장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김석호 소장


73.3%
가 트라우마 기준 넘겨..극단적인 노동강도·심리적 충격 노출

연구진은 공무원, 수의사, 농민, 지역주민 등 가축 살처분을 경험한 다양한 계층의 관계자 40여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실시했다. 인터뷰 결과를 바탕으로 살처분 과정에서의 경험과 그에 따른 심리적, 인지적, 행동적 반응을 살필 온라인 설문조사를 마련했다.

10월부터 약 2개월간 가축방역 유관기관과 본지를 통해 진행된 설문조사에는 270명의 살처분 유경험자가 참여했다. 이들 중 축산·방역 담당 공무원이 139명으로 가장 많았다.

설문조사 응답을 분석한 결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하 트라우마)를 진단하기 위한 사건충격척도의 평균 응답점수는 41.82점으로 나타났다(0~80점 척도).

기존 연구에서 트라우마 여부를 가늠하는 절단점으로 24~25점이 제시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절단점 이상의 점수를 보여 트라우마가 우려되는 응답자는 73.3%에 달했다.

Beck의 우울척도를 이용해 평가한 우울 정도는 평균적으로 경우울증 정도의 증세를 보였다. 다만 응답자 25%는 보다 심각한 중우울증 증세에 해당하는 점수를 나타냈다.

특히 살처분 현장의 노동강도는 현저히 높았다. 1~11점 척도에서 평균 9.42점을 기록할 정도다. 응답자의 86.1%가 힘듦 혹은 매우 힘듦 수준으로 평가했다.

살처분 현장을 지휘하는 수의사(가축방역관)는 ‘죽임의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죄책감과 자괴감을 느끼는 데다가, 매년 가축전염병이 재발할 때마다 극단적인 피로를 반복적으로 겪는다는 것이다.

성균관대 거버넌스연구센터 박효민 박사는 “살처분 과정에서 참여자들은 극단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돼 상당한 심리적 충격을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며 “살처분 충격에 대한 세밀한 조사와 참여자에 대한 체계적인 심리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본 연구를 이끈 천명선 교수와 박효민, 주윤정 박사
(왼쪽부터) 본 연구를 이끈 천명선 교수와 박효민, 주윤정 박사

살처분 현장의 ‘피··눈물’..위험은 위계화됐다

살처분 참여자의 심층면접을 담당한 사회발전연구소 주윤정 박사는 “고위직 공무원과 현장 종사자의 이야기는 상당히 달랐다”며 “현장에서는 그야말로 ‘맨몸으로 때운다’는 식의 엄청난 희생이 담보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밤새 살처분 현장에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 정시 출근을 피할 수 없는 데다가, 이 같은 근무여건이 가축전염병 사태가 길어질수록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조사 참가자의 약 88%가 살처분 작업 수행시 신체적인 위험이 심각하다고 응답했다. 살처분 작업이 위험해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있고, 평소에 비해 업무량이 현저히 증가하며, 충분한 휴식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응답도 70~80%대를 유지했다.

주윤정 박사는 “살처분 참여자 모두 ‘겁이 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직업윤리 아래서 헌신하고 있었다”며 “그에 합당한 처우가 제공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데에서 오는 상실감도 포착됐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살처분을 실행하면서 위험에 노출되는 계층이 위계화되는 현상도 포착됐다.

지난날 공무원이나 군인이 담당하던 살처분 작업은 축산농가의 이주노동자나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넘겨졌다. 트라우마 측면에서도 가장 큰 위험이 이들 노동자들에게 몰려 있지만, 정작 이들은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어렵고 당국이 추적 조사하기도 힘들다.

가축방역관들 중에서도 살처분 현장업무는 젊은 수의사나 대체복무자인 공중방역수의사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진다.

대한공중방역수의사협의회 김기태 회장은 “살처분 현장에서 닭이 농장 구석에 머리를 박고 있는 모습이나, 약물을 투여한 소들이 떨고 있는 모습이 간혹 떠오르는 것도 ‘트라우마’라면 일선 공중방역수의사 다수가 겪고 있을 것”이라며 “한창 방역이 급할 때는 공무원으로서의 사명감을 요구하지만, 일이 끝난 후의 처우는 ‘군인’으로 변신하는 경우가 많다”고 토로했다.


트라우마 대응은 각개전투 그쳐..국가적 돌봄 시스템 마련해야

이번 설문조사에서 ‘정신적·육체적 건강 관련 검사나 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14%에 그쳤다. ‘육체적’ 건강이 포함된 질문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심리적 지원을 받은 사람은 이보다도 더 적을 것으로 분석된다.

주윤정 박사는 “위험은 위계화되고 트라우마는 개별화되는데 반해 사회는 이를 대증적으로만 대처하고 있다”며 “국가 차원의 폭력으로 유발된 문제에 개인적으로만 대응한다면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박효민 박사는 “가축전염병이 연례행사화 되고 있는 상황에서 예방적 차원의 심리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살처분 참가자에 대한 심리적 지원을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현재는 살처분 종사자 일부가 이상증세를 느낀다고 호소하면 ‘OO에 문의해보세요’라고 알려주는 정도라면, 추후에는 거부의사를 밝히지 않는 한 반드시 트라우마 검사나 심리적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체계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처분 현장의 진행 방식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천명선 서울대 교수는 “살처분은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말살하는 행위인만큼, 동물에 대한 친화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보다 민감한 영향을 받는다”며 “동물복지적이면서 작업자의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살처분 기술을 개발하고 현장에 적극적으로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연구결과는 올해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국가인권위 관계자는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이나 관련 법 개정에 반영할 부분이 있는지 후속검토를 이어갈 것”이라고 전했다.

윤상준 기자 ysj@dailyvet.co.kr

데일리벳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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