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는 의사와 다르다
우리가 진료하는 환자는 진료 서비스의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법적으로 특정 인간의 소유물이거나 혹은 소유물이 아닌 채 국가의 책임에 넘겨져 있다. 그래서 동물진료 서비스에 대한 대가는 소유주인 인간이 지불한다.
진료비에 대한 언급은 현대 사회만의 일은 아니다. 이미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소와 당나귀의 수술비에 대한 언급이 있다.
게다가 아픈 동물을 돌보는 사람들은 다양한 층위로 존재해 왔다. 로마시대 지식인인 바로가 언급했듯, 당시에도 동물을 돌보는 데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수의사와 숙련된 목동이 모두 역할을 담당했다.
근대 의료전문직의 사정도 비슷했다. 의사나 간호사, 치과의사, 약사와 같은 다른 의료 전문직들도 사회에서 인정받는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꽤 오랜 동안 전문화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수의사가 전문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다른 전문직인 의사나 법조인들 보다는 훨씬 후대의 일이다. 최초의 수의학교가 프랑스에 설립된 것은 1761년의 일이니, 꽤나 새로운 직업군인 셈이다.
우리나라에 수의사라는 근대 직업군이 자리를 잡은 것은 일제 강점기에나 가능했다. 의사를 키워내는 국가 교육기관인 의학교나 서양 선교사들이 세운 의학교 등이 역할을 담당했던 것과는 다르게 일제강점기 후반까지 한국인 수의사는 거의 없었고, 일본인 수의사들이 주요 업무를 담당했다.
고등교육기관에서 수의사를 양성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말기인 1937년이나 되어서이고, 이 역시 한국인만을 위해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한국 전쟁 이후에나 한국에서 교육받은 수의사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한 셈이다.
그래서 현재까지 대한민국에서 수의사면허를 받은 수의사의 수는 2만 명이 조금 넘는다. 이미 작고하셨거나 업무를 떠난 수의사를 제외하면 관련 분야에서 약 만 명 정도의 수의사가 일하고 있다.
그 중에서 전통적인 축산 분야의 소나 돼지, 닭의 질병을 돌보거나, 국가적으로 방역 업무를 담당하는 수의사를 빼고, 반려동물 수의사는 약 6000명 정도 된다. 단일 그룹으로 존재하는 정말 작은 전문직이다.
그래서 수의사의 업무에 대한 대중의 이해는 단면적이거나 단편적인 경우가 많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 급격한 증가를 보였던 반려동물을 진료하는 것은 매우 다른 차원의 진료 환경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반려동물’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환자군에게 적응하는데 지금까지 겨우 한 세대가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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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의 의료 환경은 세계적인 수준이고 의약 분업을 통해 전문성의 영역이 정리가 되었으며, 전국민 의료보험이라는 엄청난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의료 환경이 그냥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매년 얼마나 많은 예산이 의료인들을 키우고, 의료 시스템을 정비하고 의료 정보를 모으고, 국민의료보험이라는 거대한 조직과 의료 전문직들 간의 이해를 조정하는데 들어가는지 알지 못한다.
따라서 보호자들은 가족처럼 여기는 반려동물을 데려가는 동물병원도 그런 시스템의 일부라고 막연히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반려동물의 기본권인 건강을 위해 국가의 의무를 규정하는 법은 전혀 없다.
반려동물의료 발전을 위한 공공 연구기관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으며, 개나 고양이가 품종에 따라 어떤 질병에 많이 걸리고 한 마리를 키우는데 평생 얼마의 의료비가 필요한지에 대한 통계가 전혀 없다는 것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심지어는 대체 몇 마리의 반려동물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되어 있다. 매년 실시하는 농림축산식품부의 반려인구 1천 만이라는 데이터는 가구별로 조사하는 인구센서스로 나온 것이 아니라 설문조사로 나온 것이다(사람 5천명에게 설문조사해서 가족이 몇 명인지 물은 다음 인구통계를 내는 셈이다).
이런 진료 환경에서 수의사는 국가 시스템의 지원 없이 오롯이 개인으로 던져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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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수의사의 양성과 교육, 면허를 관리하고 동물 진료에 대한 국가적인 지원을 하는 부서는 현재의 농림축산식품부이다. 전통적인 가축(소, 돼지, 닭)의 생산과 그 질병을 이 부서에서 담당해왔다.
이런 가축군의 질병은 경제적인 조건에 영향을 받아서 개별적인 치료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가축군 단위로 관리가 되며 많은 질병을 치료하지 않고 살처분 한다.
그러나 반려동물의 질병은 다르다. 우선 진료과가 전문화되어 있고 품종, 연령별로 개별적으로 특화된 진료가 필요하다. 인간에게 발생하는 모든 질병이 발생하며 태어나면서부터 노령 동물이 될 때까지 꾸준한 의료적 관리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는 농림축산부에서는 새로운 개념이다. 반려동물의 진료와 그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데 (사람의 의료에서는 보건복지부 전체가 종사하겠지만) 담당 직원은 고작 2명이다. 천 만 반려인구가 관련된 의료에 담당자가 딱 2명이다.
책임자인 공무원이 “쇠고기 값이나 배추값을 표시할 수 있는데, 진료비를 왜 공시하지 못하냐”고 되물을 때 나는 허탈했다. 이들에게 있어 반려 동물 진료비 문제는 해마다 선거철이면 당을 불문하고 양산하는 반려동물 정책에서 떨어진 정치적인 문제일 뿐이다.
동물 환자는 인간 환자와 다르다
동물 환자라는 개념은 수의윤리에서도 어려운 개념이다. 진료가 필요한 모든 동물이 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인간-동물 관계에 따라 의료의 수준과 그 요구가 달라진다.
정확한 통계치는 없지만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 중 1년에 한번이라도 동물병원을 찾는 보호자는 약 60% 이하로 추정된다. 학대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떤 보호자들은 평생 동안 동물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는다.
우리가 반려동물이라고, 가족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인간의 질병이나 건강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보다 적을 거라는 혹은 적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가정이 존재한다.
이는 결코 우리나라만의 사정은 아니다. 동물이 인간과 같은 지위를 누리는 곳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공공의료보험의 혜택이 큰 나라, 고급 진료를 싼 값에 받을 수 있는 곳에서 그래서 반려동물 진료비는 더욱 비싸게 인식된다. 보호자들에게 어떤 질병이었는지 보다 얼마를 냈는지가 명확하게 기억된다.
그리고 자신이나 가족이 아팠을 때와 비교하면 터무니없는 가격이라는 거부감이 늘 있다. 진료 과정을 잘 이해하지 못했거나, 진료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을 때 그 거부감은 더 커진다.
사람들이 찾는 대형 병원에서처럼 검사 때마다 미리 수납을 하지 않으면 검사를 받을 수 없는 지불 시스템을 적용하기 힘들기 때문에 누적된 검사비용을 한꺼번에 낼 때 그 부담은 더욱 크다.
말 못하는 동물의 질환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해 더 많은 진단법이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반려동물 의료 시장 자체가 규모가 적기 때문에 진단법이나 검사 비용, 진료 도구 비용을 낮추기도 어렵다. 따라서 소수를 대상으로 하는 진료이기 때문에 비용은 더 비싸질 수 있다.
즉, 반려동물 환자는 의료 서비스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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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단계에서 보호자의 승인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보호자에게 어떤 진료 행위를 하는지 알려주지 않은 채로 맘대로 진료하는 수의사는 비윤리적인 수의사다. 이는 수의과대학 학부생이면 누구나 배우는 내용이다.
진료 여부의 최종 결정권은 보호자에게 있다. 수의사와 보호자는 파트너로서 동물이 건강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왜 여전히 “깜깜이 진료”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것일까? 일부 병원의 비윤리적인 과잉진료나 진료 사기가 존재한다면 이것은 윤리적으로, 법적으로 처벌할 일이다.
다만, 문제는 수의사와 보호자 간 원활한 의사소통이 부족했다거나, 보호자가 아직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진료가 진행되었거나, 혹은 진료의 특성 상 연계되어 있어 개별 단계가 하나하나 설명이 안 된 채로 진료가 진행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동물병원의 진료 및 수납 서비스 절차 개선이나 수의사의 커뮤니케이션 역량 강화, 수의사의 윤리성 강화로 해결되어야 한다.
진료비가 보호자의 능력 범위를 벗어날 때 동물들은 아픈 채 방치되거나 버려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수의사라면 모두 안다. 그래서 보호자가 꾸준히 관리가 가능한 방식을 함께 찾아나가야 한다.
그런데 모든 문제는 진료비 과잉, “깜깜이 진료”로 수렴된다. 이에 대해 수의사들이 제기하는 주된 반론은 “무엇을 기준으로 진료비가 과잉이거나 적절하다고 판단하는가?” 였다.
질환과 관련된 환자의 상태는 물론 병원의 시설, 검사 및 진료 장비의 수준, 특정 분야에 대한 수의사의 전문성, 담당 수의사가 선호하는 진료 방식, 병원의 위치를 모두 포함할 때 같은 질환이나 수술이라도 서비스의 양상과 진료비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꾸준히 어필해 왔다.
그러나 이 상식적인 답변은 참으로 공허하게 흩어진다.
사람의 의료체계에서처럼 적정한 진료비 수준을 정하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고 의료전문가를 비롯한 각 분야의 전문가 협의를 통해 결정하는 과정을 아직 시작하지도 못했다.
정치와 정책 사이
이번 선거에서 동물관련 정책은 정의당의 일부 야생동물 관련 정책을 제외하고는 모두 반려동물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진료비를 줄이는데 집중되었다.
또한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시행할 방법이 없는 공적 동물 보험이나, 민간 영역에서 충분히 가능한 펫 시터와 같은 공약을 ‘또 하나의 소중한 가족’, ‘반려동물 돌봄 공약’ 이라는 이름으로 아동이나 노인 복지에서 쓰는 용어를 그대로 가져와 나열했다.
동물은 사람 아이의 다른 버전이 아니다. 동물은 사람과 다르다. 그 다름을 이해하는데서 이 사회 속 동물과의 공존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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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문제는 공약에 반려동물 진료 자체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것이다.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의사는 물론 보호자에 대한 배려도 없다고 본다(사실 거의 대부분의 수의사는 반려인이다).
반려동물의 복지는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주요 정당의 동물 공약은 민원처리에 마음이 급한 초급 공무원이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대체 어떤 동물의료 전문가들과 함께 마련한 정책인가 의심이 든다. 의료 정책이 의료 전문가의 연구에서 나와야 하듯, 동물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정부와 정치인들은 ‘친동물적’이라는 좋은 이미지만을 위해 전문가를 논의에서 배제한 채로, 푼돈으로 민원을 처리하는 수준으로 동물 공약을 만들어 왔다.
반려동물 센서스, 반려동물 질병 현황 파악, 반려동물 진료 발전에 대한 지원 계획, 동물 축종별 동물복지 기준 같은 국가가 동물을 정책의 범위에 포함시키고 동물과 함께 사는 이들을 돕기 위해 해야 하는 큰 틀의 의무에는 관심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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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는 전문직이다. 우리는 사명감을 가지고 우리의 윤리적인 기준을 마련하며, 서비스의 질을 향상시킬 의무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부와 정치인들이 수의사를 정책의 파트너로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 의심이 든다.
진료의 투명성과 보호자의 신뢰는 효율적인 진료와 보호자와의 굳건한 파트너십을 위해 수의사도 간절히 원하는 일이다. 진료비에 대한 보다 친절하고 이해할 수 있는 안내와 진료에서 보호자의 의사결정의 존중은 수의사 차원에서도 반드시 노력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틀에서 수의사는 항상 과잉 진료비를 청구하는 규제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문직의 의사결정과 자율성은 그 틀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이런 일방적인 공약이나 정책으로 정부와 수의사 간의 불신만 커져가고 있다.
“깜깜이 진료”와 진료비 문제가 왜 생기는지, 반려동물 의료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도 없이 선심성으로 던져지는 반려동물 공약에, 나는 고양이 네 마리를 키우는 반려인으로서도, 대학에서 수의윤리를 가르치는 수의사로서도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