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엔 초음파, 오른손엔 아이패드` 대동물 진료에도 전자차트가 있다
[인터뷰] 국내 최초로 대동물 전용 EMR ‘크로니클’ 자체 개발한 이희운 마리동물의료센터 원장
반려동물병원에는 전자차트(EMR)가 일반화되어 있다. 보호자와의 상담 내용부터 검사, 처치내용, 청구에 이르기까지 의무기록 전반이 전자차트로 기록된다. 반려동물 임상수의사들도 수련 과정에서부터 전자차트를 사용하니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젖소, 한·육우를 진료하는 소 임상에는 전자차트를 서비스하는 업체가 없다. 그래서 아예 직접 만들어버린 수의사가 있다.
국내 최초 대동물 전자차트 프로그램 ‘크로니클(CHRONICLE)’을 개발한 마리동물의료센터 이희운 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현장 진료에 적용한 지도 4년여가 되어 마리동물의료센터의 고객 농장에서는 이미 자리를 잡았다.
터치 한 번으로 개체별 진료기록, 번식성적, 우유 분석 자료가 한 눈에
6월초 평택에 위치한 한 목장에서 만난 이희운 원장의 모습은 사뭇 생소했다.
번식진료를 준비하는 이 원장은 왼손에는 고글형 모니터와 연결된 포터블 초음파의 프로브를, 오른손에는 아이패드를 들었다.
아이패드 화면에 나타난 크로니클 프로그램에는 목장 젖소들의 정보가 개체별로 정리되어 있었다. 그동안 받았던 진료 내용은 물론 우유 생산량은 얼마나 되는지, 이전 산차에는 어떤 특징이 있었는지 등 상세한 내용이 기록됐다.
스크롤 한 번, 터치 한 번이면 개체별로 진료기록은 물론 우유생산, 번식성적, 아비소의 정액 관련 데이터까지 곧장 조회할 수 있다. 목장별 유검정 데이터까지 연동되어 있다.
별개의 영역으로 분리되어 있던 진료-종축-유성분 분석이 전자차트를 기반으로 통합된 것이다.
이희운 원장은 “개체별 정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면, 진료 과정에서 어떤 사항을 중점적으로 체크해야 할 지 초점을 맞출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이 보여주는 크로니클 화면은 기대보다 더 깔끔하고 부드럽게 구동됐다. 기자가 공중방역수의사 시절 쓰면서 답답해했던 다른 방역 관련 프로그램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맥OS, iOS에서 제대로 작동된다는 것부터 놀라웠다.
이희운 원장은 크로니클 개발 초기부터 모든 운영체제에서 제대로 작동하는 호환성을 제1조건으로 삼았다고 전했다.
가치 있는 정보를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연대기(CHRONICLE)’
목장주도 함께 기록·열람 ‘목장 정보 관리에 충분하고 수기 기록보다 편해’
진료가 시작되자 목장주도 아이패드를 꺼내 들었다. 크로니클에 기록된 개체별 데이터를 농장주도 실시간으로 확인하면서 ‘000번 젖소, 낭종 있었어요’라며 히스토리를 알렸다.
이희운 원장도 크로니클에 기록된 정보를 기반으로 초음파 검사를 실시하며 개체별 상태를 진단한다. 투약 등 필요한 처치는 곧바로 진행한다.
농장주는 해당 진단·처치 내역을 실시간으로 받아적는다. 크로니클에서 다운 받은 현황자료 PDF 파일에 애플펜슬로 곧장 적는 식이다.
직장검사가 모두 끝나면 이 원장이 해당 내역을 다시 검토하고, 마리동물의료센터 사무실로 보낸다. 이를 정리해 크로니클에 업로드한다.
농장주에게도 크로니클 아이디가 주어진다. 마리동물의료센터 홈페이지에 로그인하면 크로니클에 기록된 자기 농장의 데이터를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 2주마다 정기 왕진을 진행할 때마다 전회차 내역을 인쇄물로도 제공한다.
이런 식으로 축적된 데이터가 상당하다. 젖소 개체별로 송아지때부터 전산차, 전전산차 등 수년의 기록의 쌓여 있는 셈이다. 번식관리의 연속성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입력과 열람 모두 수의사와 농장이 함께 하지만, 동시에 구분되어 있다. 농장은 보다 간편하게 입력하고 일반적인 정보를 직관적으로 열람할 수 있다. 수의사와 마리동물의료센터는 보다 전문적인 내용을 상세히 입력하고 분석한다.
이희운 원장은 “젖소 개체별 번식성적이나 산과 질환 히스토리, 유량 등 가치 있는 정보가 많지만 (전자차트 없이는) 제대로 축적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며 “다른 병원이나 농장에서 엑셀을 활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기록이나 분석, 실시간 활용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전자차트 활용에 대한 목장의 만족도도 높았다.
이날 만난 목장주는 “농장 우군관리에 대한 정보를 언제 어디서든 열람할 수 있어 편하다”며 “아버지는 아직 수기 기록이 편하셔서 병행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자차트가) 수기 기록관리보다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이 더 적어서 좋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따로 정리하지 않고 마리동물의료센터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만 봐도 충분할 정도”라며 “필요하면 언제든 데이터를 엑셀로 다운 받아 자체적으로 가공해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당일 진료 중간에 잠시 짬을 내 이희운 원장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크로니클을 개발하게 된 계기부터 전자차트의 강점, 대동물 임상교육 그리고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처방대상약 사용내역 전산보고 문제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Q. 학부 때부터 소 임상수의사를 희망했나?
소를 진료하는 수의사가 되고 싶어 수의대에 진학했다. 학부생들이 대부분 그렇듯 공부하는 내용에 따라 재밌어 보이는 분야도 많았지만, 소 임상에 대한 마음을 놓은 적은 없다.
대학원에도 소나 말을 진료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진학했다. 석사 졸업 후 축산과학원 연수를 거쳐 임상현장에 나왔다. 2009년에 마리동물의료센터을 개원했다.
Q. 대동물 전자차트를 직접 개발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임상수의사라면 누구나 그렇듯 처음에는 ‘잘한다’는 원장님들의 노하우와 진료시스템을 벤치마킹하려고 노력했다.
지금처럼 전산기록을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활용하는 수준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첫 5년여간은 노하우와 경험을 쌓는 시간이었다.
어느 정도 자신이 생긴 후에는 곧장 전자차트 개발에 도전했다. 차트 없이는 아무리 기록을 상세히 남기려고 해도 기억에 의존하거나, 기록을 활용한다 해도 최근 것만 찾아보게 된다. 개체별 번식성적, 유량, 진료기록 등 가치 있는 정보들이 사라져가는 셈이다.
Q. 아무것도 없는 출발선에서 개발하면서 시행착오도 많았을 것 같은데
프로그래머를 알아보는 것부터 힘들었다. 주변에 전공자도 없고 적임자를 찾는 과정이 정말 험난했다.
처음에는 엑셀 기반의 프로그램을 구상했는데, 계약금을 받아간 프로그래머가 연락두절이 되기도 했다. 조금 개발하다가 관두고..그런 고비가 여러 차례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될 때까지 했다. 결국 지금의 파트너를 만나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갔다. 실제 개발에는 2년여 정도 걸렸다.
Q. 원하는 정보를 몇 번의 스크롤과 터치 만으로 열람할 수 있는 점도 인상깊었다
처음 데이터베이스의 틀을 짜는 작업이 가장 오래 걸렸다.
진료에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기획은 전적으로 수의사가 해야 했다. 개발자도 대동물 분야는 생소하다 보니, 본원의 수의사 직원이 개발과정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Q. 축주가 같이 기록하고,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 수의사와 목장이 함께 열람하는 순환구조가 눈에 띈다. 처음에 농장의 참여를 설득하기 어렵지는 않았나
처음에는 돈도 못 받고 그냥 했다. 내 진료기록은 찍어가겠다고 말씀드리고 알아서 하는 식이었다.
그렇게 1년여가 지나니 데이터가 쌓였다. 농장주에게 보여줄 만한 분석도 가능해졌다. ‘보세요, 지난 산차에는 이랬는데 이번 산차에서는 이렇습니다’라며 할 말이 생긴 셈이다.
지금은 고객농장 모두가 크로니클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그만큼 차트가 번식진료의 중추이기 때문이다.
차트기록을 남기다 보니 수의사가 바뀌어도 연속성 있는 진료가 가능하다.
제가 급한 일이 있어 본원의 다른 수의사가 가도, 크로니클을 열람하면 자기가 봤던 진료처럼 파악할 수 있다. 정해진 시스템 내에서 공유하고 있는 규칙 하에 작성된 의무기록이기 때문이다.
Q. 동물병원 내부 구성원의 기록 공유, 동기화는 반려동물 임상에서도 대형 동물병원 위주로만 주목하는 이슈다. 대동물병원에서 이 같은 문제에 주목한다는 것이 놀랍다. 전자차트를 활용하는 대동물병원은 마리동물의료센터가 유일한가
다른 농장이나 병원에서도 젊은 원장님들을 중심으로 엑셀 프로그램에 기반해 정리하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엑셀 정리는 유검정 자료 등 다른 데이터를 붙여서 분석하는 것도 너무 번거롭고, 전산차나 전전산차 등 개체별 히스토리를 보여주는 것도 어렵다.
이런 측면에서 크로니클은 농장주에게 ‘중요한 정보를 잘 보여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농장에게는 정보의 양보다는 가독성이 중요하다. 목장에서 정말 활용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정보를 한 눈에 들어오게 제공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Q. 개체별 기록뿐만 아니라 각종 분석차트에도 눈길이 간다
유검정 자료에 개체별 번식 상황만 입혀서 봐도 훨씬 직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가령 유단백이 떨어지는 개체들이 임신에 문제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면, 유단백을 끌어올리는 사양관리를 실시해 번식성적을 개선시킬 수 있다는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이런 분석 중에 중요한 내용은 인쇄하여 농장에게 별도로 제공한다. 물론 크로니클 프로그램에 접속하면 더 많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Q. 목장 입장에서도 크로니클 덕분에 더 좋은 번식진료를 받는 것 같다. 이에 대한 비용도 따로 청구되는지 궁금하다
번식진료 계약과 별도로 크로니클 사용비용을 따로 청구한다. 내가 만들고 싶어서 만든 것이라고 치고 별도 추가비용없이 서비스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발전할 여지가 없다.
어떤 일이든 지속가능성이 중요하다. 더 좋은 서비스로 개선하려면 수익이 필수적이다.
Q. 크로니클 프로그램을 더 업그레이드한다는 것인가
지금은 전자차트의 기본틀을 완성한 정도다. 말하자면 ‘크로니클 1.0’이다. 크로니클 2.0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준비를 이미 시작했다.
여러가지 개선 방향을 구상하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ICT 장비와 연동성을 늘리는 것이다.
낙농 분야에서도 최신 장비들은 자체적인 디지털 데이터를 생산하는 ICT 기능을 갖추고 있다. 이를 전자차트에 연동한다면 보다 가치 있는 정보를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사실 우리 병원 단독으로 쓰기 위해 전자차트 프로그램을 개발한다는 것은 엄청난 낭비다.
현재 버전은 우리 병원의 진료에 특화되어 있어 타 병원이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측면이 있지만, 크로니클 2.0으로 업그레이드하면서 다른 원장님이나 목장이 사용할 수 있는 베이직 버전을 만드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Q. 전자차트를 직접 개발해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도 그렇고, 대동물 임상에서 첨단을 달리는 것 같다. 15년여의 임상경력 동안 소임상의 모습도 변화했나
포터블 의료기기 위주로 적극 도입하는 편이다. 이지스캔 포터블 초음파도 국내 1호로 구입했다. 개원하면서 바로 구입했는데, 비싸지만 화질 면에서 메리트가 있다 보니 보다 정밀한 진단이 가능해 만족한다.
대학이 아닌 필드에서 복강경을 활용한 대동물 외과 수술을 하는 곳도 우리 병원이 거의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혈액검사를 위한 분석장비도 선제적으로 도입한 편이다. 예전에는 젊은 수의사들이 시장에 진입해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의료기기들을) 도입했고, 저도 그랬다.
당시에는 ‘그게 뭐가 필요하냐’는 식으로 보시는 원장님들도 있었지만, 그 분들도 지금은 다 의료기기를 사용하신다. 오히려 안 쓰면 뒤쳐지는 환경이 됐다.
Q. 소임상도 점차 발전하는데 수의과대학의 대동물 임상교육은 정체되고 있는 것 같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수의대 졸업생이 현장에 나오면 인공수정사만큼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무시 받는 실정이다.
임상은 물론 생리, 약리 등 동물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 교육도 반려동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반추동물 자체에 대한 이해가 결코 깊지 않다. 저도 올해 충남대 대학원 낙농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을 정도다.
우선 수의과대학에 대동물 임상 경험이 있는 교수가 적다는 것이 문제다.
교수님들이 연구나 다른 업무로 바쁘다면 외부에서 진료를 많이 하는 원장을 초빙교수나 객원교수로 들여서라도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소양을 쌓아줘야 한다.
우리 병원은 학생들이 실습을 오겠다고 하면 가능한 받아주는 편이다. 올 여름에도 예약된 학생이 있다. 해외파병을 나가 현지 대민친화를 위해 대동물 진료에 임해야 하는 수의장교를 위한 교육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Q.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수의사처방제 전자처방전 의무화와 처방대상약 사용내역 전산보고에 대한 견해가 궁금하다
대동물 임상에서는 현장에서 약 하나 쓴 것까지 모두 입력해야 한다는데 애로사항이 있다. 저는 그나마 태블릿이라도 가지고 다니지만, 스마트폰도 피쳐폰과 다르지 않게 쓰는 원장님들이 많은데 (현장에서 입력하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다.
저만 해도 병원에는 한 달에 한 번 갈까 말까 한다. 왕진만 다니는 원장에게 (EVET 입력은) 비현실적이다.
제도 자체의 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입력시스템 자체에는 문제가 있다.
Q. 전자차트를 직접 만들만큼 의무기록에 이해도가 높고 IT기기에 익숙한 원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소 임상수의사 전부에게 문제가 아닐까
부담이 크다. 우리 병원처럼 기록을 위한 직원과 시스템을 따로 갖춘 병원이 국내에 얼마나 되겠나.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시스템 없이 (단독진료하는) 원장에게 입력하라면 잘 따를 것이라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Q. 그렇다면 제도를 어떻게 보완해야 하나
수의사처방제의 취지는 좋다. (입력이 어렵다고) 제도를 다시 되돌려서, 기존처럼 어떤 약이든 아무런 책임없이 막 팔려나가는 형태로 가는 것도 좋지 않다고 본다.
다만 행정적 부담을 최소화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전산입력 자체가 너무 번거롭다.
현재 EVET 프로그램은 굉장히 짜증스럽고 전혀 유저 친화적으로 만들어져 있지 않다. 스마트폰에서는 더 문제다. 특히 iOS에서 EVET앱은 진짜 수준 이하다.
또 처방제를 통한 의약품 관리도 중요하지만, 대동물에서는 불법진료가 더 심각한 문제다.
거세, 제각, 체혈 등을 수의사 아닌 업계 직원들이 아무렇지 않게 한다. 수의사 손길이 미치지 않는 지역은 정말 불법진료가 심각한 수준인 곳도 있다.
이 같은 불법진료에 대한 고발과 행정조치를 지원하는 체계가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