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대방역시설 의무화 논란에 돼지수의사 5인이 제시한 의견은
‘있으면 좋다’ 보다 과학적 근거 제시돼야..방조·방충망, 폐기물 보관시설 의무화 반대
정부가 전국 양돈농가의 8대방역시설 설치를 사실상 의무화하는 가축전염병예방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가운데 한돈협회가 반대 수위를 높이고 있다.
한돈협회는 1월 27일 세종 농림축산식품부 청사 앞에서 총궐기대회를 열고 집행부 삭발투쟁에 나선데 이어, 입법예고기간 마지막 날인 지난 3일 돼지수의사 5인의 의견을 포함한 반대의견을 제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돼지수의사회 고상억 회장을 비롯해 김현섭 전 회장, 박선일 강원대 교수, 이승윤 한별팜텍 대표, 권성균 애플벳동물병원장이 참여했다.
이들은 ‘있으면 좋다’ 식의 막연한 기대보다, 8대방역시설 각각의 필요성을 과학적 근거로 분석하고 중요도를 구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외부울타리, 입출하대, 방역실, 물품반입시설 등의 설치 필요성에는 공감한 반면 방조망, 방충망, 폐기물 보관시설은 필요하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돈사간 돼지 이동이 잦고, 건폐율 제한으로 인한 불법 건축물 문제에 봉착한 전실에도 간소화 해법을 제시했다.
방역은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수의사 주치의 제도 필요
고상억 회장은 의견서에서 8대방역시설 중 전실, 방조망, 방충시설의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차단방역, 예방의 과학적 효과에 대한 검증보다는 ‘이런 게 있으면 질병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일반적 기대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8대방역시설을 포함한 소독·방역시설이 미비한 농장에 사육제한·폐쇄를 명령할 수 있는 규제조항도 문제로 지적했다.
멧돼지로 인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바이러스 확산을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농장으로의 유입방지 책임을 농장에게만 과도하게 전가한다는 취지다.
고상억 회장은 “방역은 시설(하드웨어)이 아닌 운용(소프트웨어)이 더 중요하다”면서 각 농장 상황에 맞춘 방역프로그램을 만들고 이행하기 위해 ‘수의주치의 제도’를 포함한 현장 중심 방역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있으면 좋다’ 식으로는 16대, 100대 방역시설 될 것
ASF 멧돼지 산악 위주..평야지역 농가까지 의무화해야 하나
김현섭 전 돼지수의사회장도 8대방역시설의 과학적 근거가 미흡하다고 주장했다. 사육돼지의 ASF 발생과 8대방역시설의 연관성을 과학적 근거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8대방역시설 각 요소의 중요도가 차별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지적했다. 어떤 시설이 더 중요하고, 어떤 시설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지를 구분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8대방역시설에 포함된 방조망을 예로 들었다. ASF가 새를 통해 돈사 내에 유입된다는 증거가 없는데, 의무화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취지다.
김 전 회장은 “’있으면 좋다’는 막연한 기대는 과학적이지 못하다”면서 “의심되는 모든 요소를 동일시한다면 16대, 100대 방역시설을 제시해도 ASF 방역에 충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는 멧돼지에 있다고 지목했다. ASF 양성 멧돼지 발견지점 인근의 농장에서 발생한 만큼, 농장 주변에 감염 멧돼지가 나타나지 않도록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은 “ASF 발생·전파는 산악지역에서 주로 나타난다”며 “멧돼지가 없는 평야지역 농장에, 멧돼지 접근을 전제로 한 방역시설을 요구하는 것이 합당한가”라고 물었다.
일률적인 8대방역시설 의무화 대신 방역시설별 중요도, 농장의 위치와 건축·형태에 따라 탄력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외부울타리·방역실·물품반입시설·입출하대 O
전실, 폐기물 보관 시설 X
권성균 원장은 8대방역시설 중 외부 울타리, 방역실, 물품 반입시설, 입·출하대는 필요하다면서도 전실, 폐기물 처리 관리시설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권 원장은 “전실을 주로 설치했던 양계장은 입식 후 닭의 이동이 거의 없다”면서 “양돈장은 돈군이 매주 이동해야 한다. 정부가 생각하는 개념의 전실 설치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전실에 직원이 앉아서 장화를 갈아신을 수 있도록 높이 50cm가량의 내부 펜스를 두려고 해도, 직원과 돼지가 같은 통로로 이동하려면 설치가 어렵다. 돈사 외부에 따로 지으려고 해도 건폐율 제한에 걸려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폐기물 처리 관리시설을 두고서는 ‘탁상행정’이라고 비판했다. 네덜란드처럼 농장이 폐기물을 따로 보관해두면 수거해서 처리해주는 업체가 정착된 나라에서나 가능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국내에는 별도의 수거시스템이 없다 보니, 이미 중점방역관리지구에서 8대방역시설로서 폐기물 보관시설을 지은 농가들도, 만들어만 놓고 사실상 방치하는 실정이다.
권 원장은 “농장에서 사용한 주사침이나 약병도 제대로 처리하는 시스템이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라며 “사체나 부산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방조·방충망 과도 규제..전실·폐기물처리시설 간소화해야
이승윤 한별팜텍 대표도 농장 외부울타리, 울타리 경계나 외부에 설치하는 입·출하대, 가축분뇨 울타리 밖 배출 등 농장 외부로부터의 직접 전파 위험을 줄이는 방역시설 설치 취지에는 공감했다.
하지만 방조망, 방충망 등 ASF 간접 전파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조류·곤충 방지 시설은 과도한 규제로 지목했다.
전실, 폐기물 처리 관리시설에 대해서는 병원체 유입 위험은 줄이면서도 농장이 설치부담을 줄일 수 있도록 간소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전실은 돈사출입구마다 발판소독조와 교체장화를 구비하는 것으로 간소화하고, 폐기물 처리 보관시설은 사체를 처리하거나 퇴비화할 수 있는 시설로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료차량에 대한 방역조치를 액비·출하차량과 구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내놨다. 분뇨나 돼지와 직접 접촉하는 액비·출하차량과 달리 사료차량은 돼지와 직접 접촉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지목한 것이다.
8대방역시설 거론 이전에 만들어진 농장들에서 사료빈이 농장 내부에 배치된 경우 사료차량의 농장 내부 진입이 불가피한데, 돈사 배치에 따라 내부 울타리 설치도 여의치 않은 경우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8대방역시설이 ASF 위험 줄인다는 역학적 근거 제시해야
박선일 교수는 8대방역시설이 ASF 발생위험을 줄인다는 역학적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사육제한과 폐쇄명령은 정상적인 농장 경영을 차단하는 매우 강력한 조치”라며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제시돼야 정책 수용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러면서 정부 정책이 8대방역시설과 질병(ASF) 발생위험 간 역학적 분석을 사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밀어붙이는 과도한 규제 조치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