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예찬 수의학박사/연수연구원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수의인문사회학실
■ 사례
박원장 동물병원의 김고흐 씨는 3년 차 수의사이다. 이제 어느 정도의 진료는 혼자서도 소화 가능한 김고흐 씨. 어느 날, 박 원장은 학회 참석으로 이틀간 병원을 비우게 되었다.
김 수의사가 동물병원을 지키던 중, 돼지 뼈를 먹다 식도에 걸린 요크셔테리어가 내원했다.
김 수의사는 최근 박 원장에게 내시경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그렇지만 그때의 케이스는 위 내 이물 제거였고, 이물이 뼈도 아니었다.
망설여지는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식도 이물 제거도 방법이 비슷할 것 같아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환자의 흉부방사선 사진을 보며 김 수의사는 고민에 빠졌다…
* * * *
배움터로서의 동물병원1)2)
좋은 수의사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하는 것이다. 수의사는 평생학습자로서 수의과대학에서의 배움은 시작에 불과하다. 그 이후에는 각자의 영역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현장에서 배워나간다.
임상 수의사들에게 동물병원은 일터이면서 동시에 교육과 학습의 현장이기도 하다. 교육을 목적으로 운영되는 대학 동물병원은 물론이고, 일선 동물병원에서도 그때그때 환자를 진료하며 학습이 진행된다.
혼자서 책과 강의자료를 찾아보거나, 경험과 지식이 더 많은 수의사가 갓 졸업한 수의사를 가르치기도 하고, 전문지식이 다른 수의사들이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기도 하며, 여러 명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해 더 나은 선택지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학습은 실제 환자를 대상으로 하므로 윤리적으로 고려해야 할 측면들이 있다.
전문직업성에서의 역량3)
수의사가 자신의 진료 역량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고, 자신의 역량 범위 내에서 진료를 수행하는 것은 중요한 전문직업성의 실천이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역량 범위를 벗어나는 진료를 수행했을 때 야기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의 대부분은 동물과 그 보호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임상 현장은 늘 도전의 연속이다. 특히 경력이 얼마 되지 않은 수의사라면, 익숙한 케이스보다 경험하지 못했던 케이스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다고 진료실에서 맞닥뜨린 경험이 없는 모든 케이스를 평생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제나 할 수 있는 것만 해야 한다면, 경험하지 못한 케이스는 어떻게 익혀야 할까?
수의사에게 진료 역량의 범위 내에서 진료를 수행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전문직업성은 바로 진료 역량을 향상시키는 일이다.
대한수의사회의 윤리강령에도 “전문직업성 증진의 의무-수의사는 꾸준히 수의학적 전문성을 증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4)
수의사들은 대개 책이나 강의를 통해서 지식을 익히지만, 임상에서는 직접 환자를 진료하면서 경험적으로 익힐 수 있는 부분들이 분명 존재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경험이 없는 케이스를 진료하면서 학습해야 한다.
이것은 어쩌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역량의 범위 내에서 진료해야 하는 것과 경험이 없는 케이스에 도전하라는 말이 공존 가능한가?
그러나 경험이 없는 케이스에 도전하라는 말이 ‘환자로 실습해도 된다’며 허락하는 의미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수의사 윤리강령은 위에서 언급한 “전문직업성 증진의 의무”에 앞서, “동물에 대한 의무-동물의 건강과 복지를 우선적인 가치로 고려하고 지향하여야 한다”고 명시한다. 배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우선 고려해야 할 것은 당연히 환자의 건강과 복지이다.
어떻게 윤리적으로 판단할까?5)6)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이 케이스가 도전을 해도 괜찮을지, 혹은 타 병원에 의뢰(refer)해야 하는지에 대해 어떻게 윤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이전 칼럼에서는 다양한 윤리 체계에 따른 수의사의 윤리적 태도를 소개했다.7)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겪는 윤리적 딜레마는 어느 하나의 윤리 체계만을 따를 수 없는 다양한 맥락 속에 존재한다. 또한 도덕적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Mepham은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윤리적 고려사항을 보다 체계적으로 검토할 수 있도록 윤리적 의사결정을 도와주는 개념적인 도구(framework)인 윤리 매트릭스(Ethical Matrix)를 고안하여 소개했다.
윤리 매트릭스에서는 웰빙(Wellbeing), 자율성(Autonomy), 공정성(Fairness)의 세 가지 원칙을 제안한다.
웰빙은 공리주의의 성격을 띄는 원칙으로, 이익, 선의 극대화(maximising the good)로 설명될 수 있다. 동물에서의 웰빙은 복지의 극대화와 고통의 최소화로 해석될 수 있다.
자율성은 의무론적 성격을 띄는 원칙으로, 생명과 관련하여 ’그 자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로 설명할 수 있다. 사전동의와 같은 이해당사자의 자율적 결정을 존중하는 것, 동물에 있어서는 행동과 습성의 자유 등이 이 원칙에서 고려될 수 있다.
공정성의 원칙은 과정과 결과에서의 공정성을 의미하며, 이해당사자에 따라 대우(복지)의 공정성, 분배의 공정성 등을 고려할 수 있다.
우선 이 상황을 웰빙의 원칙에서 살펴보자. 수의사는 경험이 없는 케이스 진료를 통해 수의학적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이것은 미래에 더 많은 동물을 치료하는 밑거름이 될 것이므로 잠재적인 큰 이익으로 볼 수 있다.
만약, 치료를 하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지식은 얻지 못하겠지만, 동물병원과 수의사는 의료적 개입을 통해 발생 가능한 부정적인 결과의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보호자는 자신의 동물이 치료를 받아 좋은 예후를 보인다면 동물병원과 수의사에 대한 만족도가 올라갈 것이고, 반대로 동물에게 최선의 치료를 제공하지 못해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난다면 동물병원과 수의사에 대한 신뢰 감소는 물론 심적 고통과 금전적 손해가 뒤따를 것이다.
치료를 받지 못한다면, 서운한 마음과 함께 다른 동물병원에 가는 시간과 수고가 들어갈 것이다.
‘동물(환자)’은 불확실한 치료 결과의 당사자이다. 질환에 따라 다르겠지만, 치료를 받는다 하더라도 최선의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부정적 결과로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다른 동물병원에 갈 때까지 고통스러운 시간이 더 연장될 것이다.
자신이 소속된 동물병원과 원장도 또 다른 이해당사자로 볼 수 있다. 동물병원은 관계법과 내규를 준수하면서 동물병원의 인식과 평판에 영향을 받으며 서비스 제공에 대한 공정한 대가로 수익을 추구한다.
이러한 사항들을 윤리 매트릭스의 원칙에 따라 정리하면 [표1]과 같다.
매트릭스 내에 들어가는 내용이나 개수에는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각 이해당사자에 대해 세 가지 원칙을 모두 고려해 보는 것이다.
중요한 항목에 표시를 하거나 점수를 매길 수 있지만, 단순히 항목 간 점수를 합산하여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매트릭스의 취지에 맞지 않다.
최종적 의사결정은 전체적인 윤리 매트릭스를 보며, 윤리적 성찰에 기반해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의윤리학에서는 윤리적 의사결정의 한 방법으로 이러한 의사결정 도구인 프레임워크를 활용할 수 있도록 연습한다.
하지만 수의윤리학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더라도 이러한 상황에 놓이면 수의사들의 머릿속에서는 저마다의 윤리적 기준에 따라 의사결정을 위한 논리가 전개된다.
위의 표를 보면서 “이건 당연한 말이지”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한 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그 한 칸이 때로는 윤리적으로 중요한 포인트가 될 수 있다.
어떻게 윤리적으로 실행할까?8)
위의 표를 보면, 치료를 하는 경우에도 이익과 손해의 정도는 치료 결과에 따라 매우 달라지며, 따라서 치료 시 환자에 대한 위험(risk)의 정도가 중요한 고려사항임을 알 수 있다.
의사결정의 실행을 위해서는 발생 가능한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 제시가 필요하다. 결국, 이 사례에서는 ‘환자에 대한 위험을 어떻게 최소화하고 관리할 수 있는가’가 관건일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적으로 타당성을 얻을 수 있는, 환자의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지식을 익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진료하고자 하는 케이스가 기존에 알고 있는 지식의 간단한 수준의 응용을 필요로 하고, 환자에게 미치는 위험성이 적거나 발생할 수 있는 위험에 대처 가능할 때, 수의사의 충분한 사전 조사와 선행학습 이후 시도한다면 위험보다는 이익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환자에게 자신이 지금껏 활용하지 않았던 지식이 적용되고 더욱 많은 응용이 필요해서 위험도가 더 높다면, 이 케이스를 진료해야 할 때에는 아무리 선행학습을 많이 하였더라도 곁에 적절한 감독자(supervisor)가 필요하다.
이때, 적절한 감독자의 조건이 반드시 교수여야 한다거나, 엄청난 임상 지식과 연륜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직은 서로서로 가르칠 의무가 있다는 점에서 누구든지 어떠한 상황에서는 감독자가 될 수 있다.
다만, 감독자는 자신이 그 상황을 자문하고 교육하기에 적절한지 자격에 대해 스스로 질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내가 감독하고자 하는 케이스 대해 최신의 정확한 지식과 기술을 충분히 습득하고 있으며 학습자에게 구체적인 피드백을 줄 수 있는가?’
또한 많은 현장에서의 교육이 선배 수의사에게서 후배 수의사에게로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하면, 단지 지식과 기술을 알려주는 것뿐 아니라 롤모델로서 전문가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 또한 감독자의 역할에 포함될 것이다.
각주
1) Mullan, S., Quain, A., & Wensley, S. (2017). Veterinary ethics: Navigating tough cases: 5m Books Ltd. Chapter 10. Education and Training. 341-346.
2) Ramani, S., & Leinster, S. (2008). AMEE Guide no. 34: Teaching in the clinical environment. Medical teacher, 30(4), 347-364.
3) Mullan, S., Quain, A., & Wensley, S. (2017). Veterinary ethics: Navigating tough cases: 5m Books Ltd. Chapter 10. Education and Training. 341-346.
4) 대한수의사회 윤리강령, http://www.kvma.or.kr/kvma_Veterinary_society?num=7
5) Mepham, B., Kaiser, M., Thorstensen, E., Tomkins, S., & Millar, K. (2006). Ethical matrix manual. LEI, onderdeel van Wageningen UR.
6) Biasetti, P., & De Mori, B. (2021). The ethical matrix as a tool for decision-making process in conservation. Frontiers in Environmental Science, 9, 584636.
7) [수의 윤리 라운드테이블] 소를 거세할 때, 국소마취제를 쓸 수 있을까?
8) Mullan, S., Quain, A., & Wensley, S. (2017). Veterinary ethics: Navigating tough cases: 5m Books Ltd. Chapter 10. Education and Training. 341-346.
<수의 윤리 라운드토론은 대한수의사회, 서울대 수의대 수의인문사회학교실과의 협의에 따라 KVMA 대한수의사회에 게재된 원고를 전재한 코너입니다. 함께 고민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아래 QR코드나 바로가기(클릭)로 보내주세요-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