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수의대 김형준
양돈 강국, 드링킹 요구르트, 맥주 켈리, 축구 강국, 조규성의 소속팀 미트윌란…3주 전까지만 해도 덴마크라는 국가에 대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1월 31일부터 2월 7일까지 고작 일주일의 짧은 시간만에 나의 시선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세계수의학도협의회(IVSA)와 함께 떠난 내 세 번째 여행을 복기하며 느낀 점들 위주로 말해보고자 한다.
휘게(Hygge)의 미덕
GEP(Group Exchange Program) 시작 직전까지 진행되었던 인도네시아 심포지엄에서 만난 ‘아말리’라는 덴마크 친구가 있다.
아말리는 IVSA 덴마크 지부의 Exchange Officer이자 Central 지부의 임원진 중 한명이었다. 심포지엄 기간 내내 온화하면서도 사교적인 성격으로 나를 포함해 많은 친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고, 120명 가까이 되는 전원이 참여하는 총회인 GA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용기가 부족했던 나를 격려해주고 내 발언을 지지해준 고마운 친구였다.
GEP 본 행사에서 만나게 된 덴마크 친구들 역시 모두 사려 깊고 긍정적이며 배울 것이 많았다. 사소한 일에도 행복을 찾아내고 새로운 문화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좋은 귀감이 되었다.
일정 내내 어딘가로 이동할 때 가는 길을 오히려 덴마크 친구들이 앞장서는 경우가 많았다. 평균 신장도 우리보다 크고 다리도 길어서 그들의 걸음걸이를 우리가 못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과연 길을 알고 가는 건지 의심스러워서 물어보았을 때 돌아온 대답은 “가다가 그 길이 아니라면 다시 돌아가면 되고, 너희들이 잘 안내해줄 것이라 믿는다”였다. 한 때 세계 행복지수 1위, 평화지수 2위를 기록했던 비결이 어느 정도 짐작가는 사고방식이었다.
또한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진학 이전이나 혹은 대학 재학 중 어느 때라도 자유롭게 휴학할 수 있는 분위기이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아실현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다고 한다.
덴마크의 생활양식인 휘게(hygge)는 편안함, 따뜻함, 안락함 등을 뜻하는 말로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삶의 여유를 즐기는 라이프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속도와 효율성의 민족이라며 자찬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스트레스와 마주하는 우리 한국인들에게 어느 정도 필요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전 세계적 기준으로 봐도 업무 강도 및 스트레스가 상당해 자살률이 높은 편인 수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렇다.
덴마크 친구들로부터 느껴지는 휘게를 제대로 알아가기에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여름에 코펜하겐에서 함께하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며 어느 정도 체화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Defamiliarization, 낯설게 하기
IVSA와 함께하는 시간 동안은 친숙하고 일상적인 경험들도 낯설고 새로운, 그래서 재미있는 추억으로 변모한다. 일평생을 서울에서 살면서 이제 더는 새로울 것도 없다고 생각할 즈음, 덴마크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경복궁·서울대학교·인사동 등의 장소들은 이제 또 하나의 빛나는 시간들을 머금어 아름답게 기억되고 있다.
작년 IVSA 서울&강원 event에 이어 이번에도 한복 차림으로 경복궁에 갔다. 만 24세 이하만 무료입장이었기 때문에…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입어보겠는가. 올해에는 남자 한복으로 가자고 했지만 이번에도 딱히 맘에 드는 게 없었기에 결국 다른 친구들의 추천을 받아 보다 더 고운 여자 한복 풀세트 차림으로 행차를 나섰다.
사실 경복궁 자체도 학창시절에 배웠던 내용들이 희미해져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덴마크 친구들에게 뭐라도 설명해주기 위해 나 역시 다시 한번 찾아보며 복습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근정전의 용도와 그 앞에 놓인 비석들의 의미, 지붕 장식의 디테일 등을 설명하며 나름대로의 투어 가이드 역할을 해냄에 뿌듯함을 느꼈다.
향원정 앞에서 덴마크 친구들에게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놀았던 것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웃음짓게 된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렇게 천진난만하게 놀아본 게 얼마만인지도 잘 모르겠다. 날이 추운데도 불구하고 나와 함께 한복 차림으로 이곳 저곳 누벼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한편, 서울에 살면서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거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들 또한 덴마크 친구들과 함께하며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덴마크는 국토 전체가 평지에 가깝다. 국가 전체에서 가장 높은 산마저 고도 170m 정도인 언덕에 가까운 몰레회이(Mollehøj)인데 그 뜻은 ‘천국 동산’이라고 했다. 그 때문인지 서울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남산에 올라가는 것을 무척 기대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덴마크 친구 모두가 케이블카를 타고 싶어 해서 덩달아 나도 처음으로 남산타워행 케이블카를 타 보았다. 탑승객들이 움직이자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보고 ‘케이블 스윙’이라면서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모습이 정말 귀여웠다. 우리 숙소는 어디 있고, 서울에서 제일 높은 롯데 타워는 또 어디 있는지 알려주며 바라본 야경은 멋진 사람들과 함께여서 그런지 유난히 반짝였다.
IVSA였기에 가능했던 값진 경험들
의지만 있으면 서울에서도 외국인들을 찾을 수 있고 친해질 수도 있지만 외국의 수의대생들과 교류하고 수의학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IVSA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덴마크는 코펜하겐에 1개의 수의대만 있고 성비는 여자가 90% 가까이 된다고 한다(이러한 성비는 유럽 전반적인 경향성인 것 같다).
양돈업·낙농업 강국인 만큼 대동물 수의사의 비율도 높고 교육과정에서 말 수의학 또한 주요 내용 중 하나로 다뤄진다. 그래서 그런지 학년은 나보다 낮음에도 말과 관련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진 친구들이 많았다.
한국마사회에 방문하여 말 동물병원을 견학할 때 덴마크 친구들로부터 정말 많은 질문들이 오갔고 아직 배우지 못한 내용도 많아 따라잡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나 또한 열심히 질문해서 모르는 내용은 결국 다 따라잡으며 좋은 지적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정말 감사하게도 VIP실에서 경마를 관람하고 베팅도 해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받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동물제중원 금손이’ 한방동물병원 견학 역시 기억에 남는다. 한방수의학은 나에게도 낯선 분야였기에 한번 체험해보고 싶었는데 좋은 기회가 되었다.
원장님께서 침과 뜸 치료의 원리 및 주요 혈자리 등에 대해서 알려주시고 직접 더미에 침과 뜸을 놓을 수 있게 해주셨는데, 예상했던 대로 한의학의 과학적 근거와 관련된 질문들이 쏟아졌다.
접근법이 다르기에 양의학과 비교하여 동일한 방식의 실험적 데이터 및 논문 자료는 부족하다는 말에 의심을 거두지 않은 친구도 있는 반면, 실습 과정에서 침술과 비슷한 물리치료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는 친구는 한의학의 관점을 최대한 이해해보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원장님의 말씀에 따르면 한의학에서 말하는 ‘기’의 흐름은 현대과학에서 ATP를 이용한 세포 호흡 과정과 동일한 것이지만 서로 이야기하는 언어가 다를 뿐이라고 한다. 이렇게 직접적 예시를 들어주시니 나 역시 편견이 걷히고 더 많은 공부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원 N 동물의료센터’에 견학을 다녀온 친구들도 있었다. 노원 N 동물의료센터는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를 가진 병원으로, 1차 진료보다는 2차 이상의 진료를 주로 실시하며 응급환자도 많이 본다고 한다. 이에 따라 거의 모든 검사와 수술, 약 처방까지 한 건물 안에서 완료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고양이의 특성 때문에 강아지와 고양이가 사용하는 공간이 한 건물 안에서 각각 구분되어있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덴마크에서는 약물 오남용을 예방하기 위해 약물의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어 아무리 큰 소동물병원도 원내제조에 제한이 있고, 약국의 승인을 받아 다른 공간에 보관되어 있는 약물을 가져와 사용해야 하는 불편이 있다고 했다.
또 한가지 덴마크와의 차이점은 주로 내원하는 강아지의 품종이었다. 우리나라는 80% 이상 소형견을 기르며 병원 시설 또한 소형견 위주로 설치되어 있는 반면, 덴마크는 대형견을 많이 기르며 처치시설 또한 대형견에게 맞추어져 있어 노원 N 동물병원의 편리한 처치실을 보고 많이 놀라하던 친구들이 많았다.
견학 후에 진행된 세미나 시간에는 한국의 반려동물 현황과 수의계의 구조를 소개해주셨는데, 덴마크 친구들이 흥미로워 한만큼 한국인 참가자들도 미래에 몸담을 세상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다시 한번 병원 구석구석을 보여주시고 열정적으로 설명해주신 수의사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한편 서울대학교에서 윤준원 교수님의 특강을 듣고 덴마크 친구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본 것 역시 귀중한 시간이었다. ‘범국가적 팬데믹 상황에서 수의사와 수의독성학자의 역할’에 대해 강의해주셨는데, 솔직히 말해서 소동물 임상쪽 진로를 희망하는 내가 많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였기에 흥미롭게 들을 수 있었다.
덴마크 친구들의 경우 수의사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있고, 동물복지에 관해서도 우리보다 깊은 차원까지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조금은 부끄럽기도 했다.
해양생물들을 위해 중금속 없는 선크림만을 구매하고, 원헬스에 관해서도 나보다 훨씬 풍부한 지식으로 많은 질문을 던지는 그들로부터 수의학도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 많은 깨달음을 얻는 귀중한 시간이 되었다.
Culture night과 white T-shirt party 역시 IVSA가 아니라면 즐길 수 없는 전매특허의 행사다.
덴마크산 호밀빵에 토마토 고등어 통조림을 올려 먹는 것은 고추참치와 맛이 흡사해서 정말 내 입맛에 딱 맞았고, 덴마크에서는 만 16세부터 마실 수 있다는 달콤한 술을 홀짝이며 “한국에도 당장 도입해야 한다”는 농담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호기롭게 도전했으나 호되게 당했던 감초사탕, 58도짜리 덴마크 술인 스납스 모두 색다르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한편 나보다 불닭볶음면을 잘 먹고 소주도 몇 잔씩 털어넣는 덴마크 친구들은 조만간 귀화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원래 white T-shirt party는 다시 볼 날의 기약이 뚜렷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감상에 젖어 메세지를 써주다 보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는 올 여름 코펜하겐에서 다시 볼 친구들이기에 그만큼 슬프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다만 이 친구들과 보냈던 일주일이 정말 아름다웠기에 이 시간이 끝나감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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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친구들과 함께한 일주일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이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한 달, 아니 일 년이 지나더라도 해보지 못했을 소중한 경험들을 압축적으로 할 수 있었던 선물같은 시간이었다.
춤을 사랑하고 5분 이상 걸어갈 땐 일명 walking beer가 필요한, 새벽 1시쯤 되면 모두 자러 들어가고 한국인들보다 위 용량이 적은, 그와 더불어 행사의 참가자인 동시에 organizing committee 역할까지 멋지게 수행해준 우리 한국인 참가자들 역시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들이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코펜하겐에서 펼쳐질 우리 여정의 다음 장은 더욱 아름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