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종합병원처럼 진료받길 기대하며, 동네 동물병원으로 향한다

수의료 기대수준-지불의사 불균형..경제적 부담이 보호자와 수의사 모두를 압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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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물 임상에서의 질문은 이제 ‘뭘 할 수 있느냐’에서 ‘어디까지 하느냐’로 넘어가고 있다”

10월 26일(토)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FAVA 2024 수의윤리·교육 세션에서 연자로 나선 오스트리아 빈 수의과대학 스벤야 스프링거 박사는 현대 소동물 임상에 주어진 윤리적 질문을 이렇게 제시했다.

인공관절, 인터벤션, 차세대 항암치료 등 임상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반려동물 환자들이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지만, 그에 수반된 비용 상승이 보호자는 물론 수의사까지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수의 보호자가 사람과 다름없는 수준의 진단·치료를 원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고품질 의료서비스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1차 동물병원을 다니는 비중이 더 높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수의사 대부분이 보호자가 치료를 거부하는 강력한 요인으로 ‘경제적 한계’를 꼽고 있다.

오스트리아 빈 수의과대학 스벤야 스프링거 박사

빈 수의과대학을 졸업한 스프링거 박사는 동 대학원과 코펜하겐대학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밟으며 수의윤리 연구를 진행해왔다.

이날 ‘현대 소동물 임상의 변화, 기회와 도전’을 주제로 발표를 시작한 스프링거 박사는 “수의학적 역량이 꼭 옳고 책임감 있는 치료로 이어지지는 않는다”고 지목했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실제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수의사의 진료적 결정에는 환자의 삶의 질뿐만 아니라 보호자의 경제적 사정, 다른 동료 수의사와의 관계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한다. 그 중에서도 경제적 한계가 중요한 요인으로 지목됐다.

스프링거 박사는 “(임상기술 발달로) 할 수 있는 진단·치료 옵션의 범위가 커질수록, 수의학적으로 지시되는 처치를 보호자가 거부하는 경우에 대한 윤리적 갈등도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기술이 발달하고 시장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수의사에게도 경제적 부담이 커졌다. 고가의 의료기기를 마련하거나, 전문성을 더 높이기 위한 교육을 받는데 드는 비용도 늘어났다.

스프링거 박사팀이 오스트리아, 덴마크, 영국의 개·고양이 보호자 2,11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고급진료(advanced) 옵션을 기대하는 보호자의 비율이 절반에 달했다.
반면 같은 연구에서 전문의(specialist)에게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는 응답은 10%대에 그쳤다.

반려동물 보호자의 기대와 지불의사 사이의 불균형도 수의사를 압박한다.

스프링거 박사팀은 오스트리아·덴마크·영국의 개·고양이 보호자 2,117명을 대상으로 발전된 수의서비스(advanced veterinary care)에 대한 기대치를 조사했다.

그 결과 내시경·관절경·CT·MRI와 같은 고급진료옵션을 기대하는 응답자는 40~60%에 달했다. 반면 전문의(specialist)에게 진료를 받아봤다는 응답은 평균 10%대에 그쳤다. 스프링거 박사는 “응답자의 70% 이상은 수의사 1명, 많아야 3명까지 있는 작은 병원에 간다고 답했다. 기대와 실제의 미스매치가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동물진료비 지불의사(willingness to pay)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분석한 연구에서는 개와 고양이 모두 보호자와 동물의 감정적 애착(emotional attachment)이 깊어질수록 지불의사가 유의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을 보였다.

반면 보호자의 소득 수준이나 환자의 나이와는 유의적인 연관성이 관찰되지 않았다. 돈이 많아야만 동물진료비를 많이 쓰는 것도 아닌 셈이다.

‘위중한 반려견에게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치료가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지불할지’를 묻는 질문에 ‘그냥 안락사하겠다’고 대답한 비율은 저소득층보다 연 8천만원 이상 고소득층에서 오히려 더 높게 나타나기도 했다.

앤 퀘인 유럽동물복지행동의학전문의

호주 시드니 수의과대학에서 강연하며 소동물 진료도 병행하고 있는 유럽동물복지행동의학전문의 앤 퀘인은 수의사가 가장 흔하게 겪는 도덕적 스트레스로 ‘경제적 한계로 인한 치료 거부’를 꼽았다.

영국(2012), 호주(2015), 미국(2018) 등에서 실시된 수의사 대상 설문 연구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특징이다.

스프링거 박사가 2021년 발표한 연구에서 오스트리아·덴마크·호주의 수의사 64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94%의 응답자가 ‘경제적 한계’를 보호자가 치료를 거부하는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수의사 4명 중 1명은 월5회 이상 이러한 이유로 거절을 경험한다고 답했다.

경제적 이유로 치료 제안을 거절 당하는 것은 수의사들에게 흔한 일이다

경제적 한계를 개선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반려동물보험(펫보험)이 꼽힌다.

같은 연구에서 오스트리아·덴마크·호주의 수의사들이 개·고양이 보호자들과 펫보험에 대해 논의하는 빈도는 나라별로 큰 차이를 보였다.

고객들과 펫보험에 대해 논의하는 빈도를 묻는 질문에 ‘자주 혹은 언제나’로 대답한 비율은 덴마크와 영국 수의사에서 70%에 달한 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15%에 그쳤다. 연구진은 오스트리아의 반려동물 보험 가입률이 10%에 훨씬 못 미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보험이 일상적인 진료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험을 바라보는 인식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치료옵션을 결정하는데 경제적 한계가 주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는 긍정적 반응과 함께 경제적 부담이 줄어들수록 진단검사가 늘고 과잉치료로 흐를 위험성도 높아진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스프링거 박사는 비용 측면에서 사회보장제도의 도움을 받는 의료비와 개인이 전액 부담해야 하는 동물의료비를 비교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전제하면서 “펫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미래를 대비해야 할 보호자의 책임을 이행하는 것”이라고 지목했다.

사람 종합병원처럼 진료받길 기대하며, 동네 동물병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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