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테크니션 제도화 위해 동물병원 종사자의 진료보조행위를 허용하자?
정부의 수의테크니션의 주사 및 채혈행위 합법화 추진.. `논란`
대한수의사회가 수의테크니션 제도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한다. 정부가 수의테크니션의 진료보조 업무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일자리를 창출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사실상 수의테크니션 직업군의 제도화를 추진하는 것이다.
제도 마련의 불씨를 당긴 것은 3월 4일자 중앙일보의 ‘미국엔 동물간호사 8만명…정부가 나서서 길 열어줘라’ 기사였다.
해당 기사에는 ▲미국에는 수의테크니션이 수의사(6만 3천명)보다 1.3배 많은 8만명이다 ▲미국 수의테크니션은 남성 5400만원, 여성 4100만원의 연수입을 올린다 ▲일본의 경우에도 수의테크니션이 2만 5천명으로 수의사(2만명)보다 많다 ▲한국의 경우 수의테크니션에 대한 별도의 면허나 자격증이 없기 때문에 이들이 주사를 놓거나 채혈하는 것은 불법이다 ▲수의테크니션처럼 규제 때문에 도입되지 못한 직업만 키워도 일자리가 대폭 늘어난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해당 기사가 게재되고 며칠 뒤 정부(농식품부)에서 동물병원 진료보조 인력에 대한 법적 근거 마련을 추진하고 나섰다. 이를 위해 수의사법 시행령 제12조(수의사 외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진료의 범위)를 개정하여 ‘동물병원 종사자가 수의사의 지시·감독을 받아 수행하는 진료보조행위’를 법으로 인정하는 방법이 추진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수의사법 시행령 제12조가 인정하는 ‘수의사 외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진료’는 1. 수의학과 학생의 전공실습 2. 수의학과 학생의 동물의료봉사 3. 자기가 사육하는 동물에 대한 진료 행위 등 3가지 뿐이다.
수의테크니션 제도화, 급하게 접근하면 부작용 생길 우려 있어
토론회를 통한 공론화, 사회적 합의 선행 필요
한편, 이번 제도 마련 과정을 보면서 ‘정부가 왜 이렇게 속도를 내는지 의문’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수의테크니션이 동물병원 경영 활성화 및 진료 효율화에 도움이 되고, 장기적으로 수의테크니션 제도가 양성화돼야 한다는 것에도 많은 사람이 동의하지만, 이번 처럼 수의사법 시행령을 개정하여 한 번에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일선 임상수의사 A씨는 “수의테크니션 양성화는 예전부터 논란이 됐던 주제”라며 “아직 그에 대한 공론화 및 합의 과정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 수의사 및 관련 관계자·협회 간의 합의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수의테크니션 제도화 자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지금도 대형동물병원과 소형동물병원 간의 양극화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수의테크니션을 제도화하여 그들의 업무를 법으로 보호해주면, 동물병원 사이의 빈익빈부익부가 더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의테크니션 활용은 오히려 소형동물병원에서 더 필요하다고 알려져있지만, 현재 국내 수의계에서 실제로 수의테크니션을 많이 고용하는 곳은 대형동물병원이다.
지난해 5월 한국동물간호협회 창립을 계기로 수의테크니션 양성화 문제가 논란이 되자, 데일리벳에서 이와 관련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설문조사에는 273명이 참여했으며 이 중 177명이 ‘현 시점에서의 수의테크니션 양성에 대해 반대’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공론화 및 이해관계자 간 합의와 함께 수의테크니션 제도화에 앞서 진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수의사법상 진료(또는 진료보조업무)의 범위가 어디까지냐 하는 것이다. 지금도 진료 및 진료보조행위의 범위가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참고 : [위클리벳 26회] 도대체 동물 진료의 범위는 어디까지 인가요?)
대표적인 사례 2가지만 살펴보자.
지난해 초, 동물병원에서 근무했던 박 모씨가 수의사를 사칭하고 불법진료를 하여 벌금 200만원 구약식 처분을 받은 일이 있었다. 박씨는 자신의 운영하는 블로그와 반려동물 커뮤니티에 글과 댓글을 쓰면서 ‘결혼 전에 수의사로 있었지만’, ‘동물병원 운영했을 때’ 등의 표현을 사용하며 수의사를 사칭했다.
또한 “고양이 복막염을 치료한 내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 “10년 넘게 애완, 애묘를 수술하고 진료하면서 실습하면서 터득한건데”, “언제든 애기들 아프면 질병 치료 상담주세요”, “요즘 동물보호소에서 질병 상담 중인데 그리로 오세요”라며 불법진료를 하고, 약품까지 판매했다.
박씨는 동물병원에서 근무하며 IV카테터 장착, 주사 등의 테크닉과 지식을 습득한 것으로 밝혀졌다. 진료의 범위가 구체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수의테크니션의 업무 범위도 정확하지 않고, 그로 인해 박씨가 카테터 장착, 주사 등의 진료 행위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12월 29일 방영된 <EBS 자유학기제-내 인생의 직업> ‘동물의 수호천사, 수의테크니션’ 편에서는 수의테크니션이 ‘약짓기’, ‘검이경 사용’, ‘청진’, ‘신체검사’, ‘엑스레이 촬영’, ‘슬개골 탈구 검사’ 등을 직접 하는 장면이 소개됐고, 큰 논란이 됐다.
당시 방송을 시청한 수의사들은 “수의테크니션이라는 직업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아직 수의테크니션의 역할과 업무가 제대로 지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치 수의테크니션이 진료행위를 할 수 있는 것처럼 소개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해당 동물병원은 현재 행정처분을 받은 상황이다.
이 방송 이후 ‘약 짓는 것과 엑스레이 촬영은 테크니션이 해도 되는 것 아닌가?’라고 묻는 수의사들도 있었다. 그만큼 진료보조업무의 범위가 구체화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의테크니션이 양성화 되지 않았음에도 수의사 사칭 및 동물병원 내에서의 불법진료 행위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근본적인 해결책 없이 수의테크니션을 제도화하는 것은 성급한 행동일 수 있다.
그것도 공론화, 사회적 합의 없이 단순히 시행령을 개정하여 법적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게 된다. 1994년 자가진료가 전면 허용된 것도 시행령 개정을 통해서 였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물병원 종사자의 직업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것도 문제의 소지를 가지고 있다. 동물병원의 규모와 진료 축종에 따라 동물병원에서 근무하는 인력의 종류와 수가 달라지는데, ‘모든 동물병원 종사자’라는 포괄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진료보조행위를 허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도 자가진료가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산업동물 분야에서는 항생제 오남용 문제가 발생하고, 반려동물 분야에서는 동물학대 행위’가 벌어진다.
또한 일부 동물약국 약사의 진료 유사 행위, 사료·제약 회사에서의 거세 행위, 가축방역사의 채혈 행위, 인공수정사의 인공수정 외 진료 유사 행위 등 현재도 진료 및 진료보조업무에 대한 정리가 필요한 상황인데, 성급히 수의테크니션 제도화를 추진할 경우 애매한 상황이 더 많이 생길 수 있다.
일선 수의사들이 지적하는 더 큰 문제는 정부가 수의사의 진료권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수의사법은 ‘수의사가 아니면 동물을 진료할 수 없다(제10조 무면허진료 진료행위의 금지)’고 선을 그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행령 제12조(수의사 외의 사람이 할 수 있는 진료)를 통해 광범위한 예외규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가진료의 전면 허용은 법 취지에 상반되는 시행령이라는 법리적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비전문가에 의한 의약품 오남용으로 인한 축산물 보건 위협과 동물 학대성 마구잡이 진료행위를 유발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이처럼 수의사의 진료와 관련된 수의사법과 시행령에 문제점이 많은 상황에서, 시행령 12조를 개정하여 수의테크니션의 진료보조업무를 허용하려는 것은 ‘정부가 수의사들의 진료행위를 얼마나 쉽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수의사는 “수의사 면허를 발급하는 주무부처인 농식품부가 이런 단순한 방안을 생각했다는 것이 안타깝다”며 “농식품부는 시행령 개정을 통해 수의테크니션 제도화를 추진할 것이 아니라, 시행령 12조의 문제점은 없는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 외에도 수의테크니션 제도화가 과연 수의테크니션의 고용 확대에 실제 도움이 되는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수의테크니션의 고용 효과는 보지 못한 채 애꿎은 수의사 고용만 축소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이 때문에 대한수의사회 설문조사를 통해 수의테크니션 제도화에 따른 추가고용 여부와 고용수의사에 미치는 영향(고용 악화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라는 속담이 있다. 잘 아는 일이라도 세심하게 주의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수의테크니션 제도화의 필요성에는 어느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문제는 그 ‘시기’다.
정녕 지금이 수의테크니션 제도화의 적기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함께, 공론화와 사회적 합의 없이 수의사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