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의인물사전 23. 김종희(金鍾禧, 1909~1996). 해방 당시 남한에서 활동한 2명 중 한 명의 수의학사, 북한의 우역 방역을 위해 예방약 제공, 월북 후 김일성대학 수의학연구소장 역임, 김일성상 수상
1909년 2월 26일 평안남도 문덕에서 출생하였다.
서울 중앙고보(1927)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수학하다가 학생 운동으로 퇴학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홋카이도 제국대학 축산2부(현 수의학과)를 졸업(1937)하고 대학의 조수로 있다가 1942년 부산 가축위생연구소 기사로 부임하였다. 해방 당시 남한에서 활동한 수의학사는 김용필과 더불어 두 사람뿐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해방 무렵 장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퇴원은 무리라는 원장의 말을 무시하고 퇴원하여 일본인들로부터 부산 가축위생연구소를 접수하였다. 해방과 더불어 일본인이 물러남에 따라 연구소에는 많은 연구 인력이 필요하였고, 당시 판임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전문학교 출신의 대상자(세균과)가 있었으나 나가사키 의과대학에서 장내 세균을 연구하던 안진영을 기술 담당 부소장으로, 장진호를 행정 담당 부소장으로 초빙하였다(당시 부소장은 정식 직책이 아니었다.).
이것은 연구소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는 시도였지만 연구소 내 불화의 씨앗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부산 가축위생연구소는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으로 전파되는 우역을 차단하는 전진기지 역할을 한 곳이다. 한만(韓滿)국경 지대에 방역대(immune zone)를 구축하여 철저한 방역을 실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1월 함경도에 우역이 발생하여 큰 피해가 났다. 해방 후 38선으로 분할된 이북 땅의 방역 문제가 시급을 요하는 일이었지만 연구소 내 사람들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중 1946년 이른 봄 후배인 김풍년이 북한에서 배를 타고 연구소에 찾아와 우역 예방액과 면역혈청의 분양을 요청했다. 미 군정청에 승인을 요청하면 사회 분위기로 보아 불가능할 것이 뻔했고 남한의 연구원이 북한으로 들어가 방역 활동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김종희는 심사숙고 끝에 병독부 실무책임자에게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예방약과 우역혈청을 내주시오. 이북에서의 방역은 이남을 위한 방역이 될 것이고 나중에 미 군정청이 알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이에 상당량의 우역 예방약과 면역혈청이 북한으로 수송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동안 잠잠했지만, 인사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직원이 미 군정청에 투서하여 조사가 시작되었다. 예방약을 건네준 병독부 실무책임자는 조사에서 제외되었지만, 김종희 소장이 조사를 받았다. 그러던 차에 연구소 내 두묘부에 큰 화재가 발생하여 방화냐, 누전이냐로 다시 연구소가 분란에 휩싸였다. 결국, 그는 미 군정청의 사전 승인 없이 각종 예방약을 북송한 데 책임을 지고 소장직에서 해임됐다. 아울러 그가 초빙한 간부들도 연구소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여러 경로를 통하여 연구만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하였으나 미 군정 하에서 복직이 원만하게 처리되지 못했고, 1946년 말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그의 해방 후 연구소 업무나 우역 제제 북송에 이념이 개입되어 있다고 의심되지는 않았지만, 인사에 불만을 가진 직원과의 불협화음과 시대 상황이 우수한 인재를 자진 월북시키는 안타까운 상황을 만들고 말았다(그는 월북 후 한자 이름을 宗熙로 개명해서 사용함).
통일부 자료에 의하면 1946년 11월 월북하여 1947년 1월 9일 김일성을 접견하였고, 1947년 이후 김일성대학 농학부 부학부장(김일성대학 농학부는 원산으로 이전함), 원산농대 수의학과 교원, 수의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1965년 농업과학원 수의학연구소 연구사가 되었고 김일성상을 수상했으며 박사 및 원사 칭호를 받았고, 1979년에는 교수 칭호도 받았다. 북한에서 수의생물약품공장을 만들어 수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고, 우역 백신과 혈청에 대한 연구 등 많은 업적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1996년 10월 24일 타계하였다. 글쓴이_양일석
*이 글은 한국 수의학 100여년 역사 속에서 수의학 발전에 기여를 한 인물들의 업적을 총망라한 ‘한국수의인물사전’에 담긴 내용입니다. 대한수의사회(회장 김옥경)와 한국수의사학연구회(회장 신광순)가 2017년 12월 펴낸 ‘한국수의인물사전’은 국내 인사 100여명과 외국 인사 8명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요, 데일리벳에서 양일석 전 서울대 수의대 교수를 비롯한 편찬위원들의 허락을 받고, 한국수의인물사전의 인물들을 한 명 씩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