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 우리는 생명과 관련된 많은 문제가 산적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많은 문제들은 모두가 인간이 저지른 행위에 의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누적되어 전 지구적인 기후 위기라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생명과 관련된 현상에서 무엇 하나 동떨어진 것은 없습니다. 지구의 생명은 모두 생명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동물을 비롯한 뭇 생명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수의사는 동물을, 더 나아가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깊은 고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에 <생명을 위한 수의사 포럼>은 생명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하기 위하여 매달 생명과 관련된 다양한 책을 읽고 나누고 있습니다. 그 나눔을 동료 수의사분들과도 함께 하고자 데일리벳의 협조를 얻어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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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에 함께 나눈 책은 칼 짐머의 『기생충제국』이었다. 처음 도서가 선정되고 하트가드와 프론트라인을 떠올리며 혼자 쓴웃음을 지었던 것은 안비밀이다.
12월20일 송년회를 겸해서 신논현역 근처에서 와인과 간단한 안주와 함께 조촐하게 모임을 가졌다.
대학 때에도 그저 이수가 목적이었던 기생충학… 수의사인 나 자신도 그저 박멸의 대상이라고만 생각했었고, 세상에선 흔히 기생이라는 의미부터가 부정적으로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다른 존재에 빌붙어 사는 것들’ 내지는 다른 사람의 피땀 어린 결과물을 날로 먹는 얍삽하고 몹쓸 사람들을 빗대어 기생충 같은 사람들로 표현할 정도로 기생충이라는 말은 혐오스럽고 경멸할 때 사용한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기생충이 생태계와 진화 및 인간에게 얼마나 거대한 영향을 미쳤는지 지금까지 몰랐던 기생충들의 눈부신 활약상을 볼 수 있어서 참 신선했고, 한편으로는 반려충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반충 정도의 이름이면 어떨까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며 기생충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이 상쇄되었다.
상처를 주고 떠나간 헤어진 인연도 좋고 싫음이 섞여 있고 사랑함과 사랑하지 않음이 섞여 있을텐데 기생충이라 하여 어찌 나쁜 점만 있으랴.
이 책을 읽다보면 생명의 기원과 존재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하게 된다.
나는 정말 나 스스로 존재하는가?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혼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생물학적으로도 절대 혼자 존재 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알게 된다.
예전에도 어느 다큐프로그램에서 장내에 정상적인 세균들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람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사람 안에 수많은 세균과 바이러스, 원충들이 존재하고 그들과 인류는 오래전부터 공생해오고 있다. 한낱 세균들에게도 의존적인 우리의 존재…과연 누가 기생충이고 누가 숙주인 것일까?
기생충은 때론 여러 숙주를 옮겨가며 또 모양을 바꿔가며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고 세련되고 정교한 물질을 분비해서 숙주의 면역체계를 조종하고 심지어는 의식까지도 조종을 하며 힘들게 살아간다.
기생충이 사는 모습을 알게 되면서 왜 이렇게까지 기생충은 굳이 살아가는지 궁금해졌다가 이내 ‘그런 궁금증조차 인간의 삶이 기생충의 삶보다 더 가치있고 의미있고 진화된 삶이라는 단정 하에 한 오만하기 그지없는 인간적인 생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워졌다.
삶이란 어쩌면 세상 모든 생명체에게 공평하게 소중한 것이다.
이 책은 존재에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일지 잠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우리는 그냥 존재하는 것일 뿐. 누구보다 더 의미있지도 꼭 의미있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책에서 인간을 ‘두발로 걷는 포유류’로 표현하며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동물보다 더 진화되고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겸손하게 표현하는 부분은 교만했던 지나온 내 삶 그리고 타인이나 동물과의 관계에서 배려보단 이기심을 앞세웠던 시간들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었다.
기생충에 대해서 읽은 책이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다니… 그만큼 기생충의 삶의 방식은 다양하고 정교하고 수준 높다는 것을 이 책의 저자는 기생충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하게 알려준다.
책에서 기생충은 숙주에게 기생충의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손상만을 입힐 뿐 너무 심하게 손상되면 결국에는 기생충 스스로에게 해가 될 것이라고 진화를 통해서 배웠다고 말하며, 우리 인간도 성공하고 싶다면 배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지구가 숙주라면 인간은 기생충’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을 하며 농토를 만들려고 표층 흙을 벗겨내 버리면서 제대로 복원하지도 않고, 바다에서는 물고기의 씨를 말리고, 숲은 말끔하게 잘라내는 인간에게 은유적이지만 엄중한 경고를 하며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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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퍽퍽하고 안쓰러운 임상 현실을 보면서 임상 수의사들에게도 안식년이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먹고 사는 문제를 쫓아 주변을 돌아볼 틈 없이 또 한해가 지나가지만 결국 먹고 사는 문제에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제게 ‘생명을 위한 수의사 포럼’ 모임은 어쩌면 안식년같은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 수의과대학을 입학했을 때 지금처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꿈꾸진 않았을 겁니다. 이제는 아련하게 남아있는 우리 안에 있는 노스텔지아의 손수건을 떠올리며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이 모임에 많은 동료 수의사분들이 참여해서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함께 줄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감합니다.
김도균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