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수의관 3년을 마치며/김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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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하는 수의사들에게 ‘군대’는 대부분 피하고 싶은 단어다.

그러나 어디에나 수의사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고, 군대에서도 자긍심을 가지고 각자의 역할을 묵묵히 해낸 멋진 수의사들이 있다. 그렇기에 군의 수의관들이 하는 역할과 그 부대의 장점과 단점 등을 간단한 소개하고 3년간의 복무 소회를 전하고자 한다.

이 글은 ‘수의관이 공중방역 수의사보다 더 힘들어!’라며 엄살을 피우고 분란을 조장하거나, ‘군대에서 수의관은 하는 일도 없던데…’라며 회의적인 시각을 던지는 글이 아니다.

(필요한 정보들은 여러 수의장교들에게 서면 인터뷰를 실시하여 취합했습니다. 조사하지 못한 해군, 공군 수의장교분들 죄송합니다.)

김형규

2017년 2월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졸업(제60회 수의사 국가시험 합격)

2017년 4월 국군의무학교 임관

2017년 12월 ~ 2019년 5월 레바논 평화유지군

2019년 5월 ~ 2020년 4월 국군의학연구소(4.25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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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2월. 국가시험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과 삼척 여행을 가던 중 ‘군대 분류가 발표됐다’는 단체 알림을 보고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수험 번호와 이름을 입력했다.

조회 후 나타난 창에는 [육군]이라는 단어가 있어 동기들에게 물어봤다. “육군이면 공중방역수의사 가는 건가?”

질문에 곧이어 쏟아지는 동기들의 웃음과 축하의 메세지가 앞으로의 3년이 군대라는 곳에 바쳐지게 됨을 느끼게 했다. 삼척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포켓몬고에서 망나뇽을 잡고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가 되었다.

그렇게 3년의 복무 후 전역한 주말, 내일부터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싱숭생숭하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현직 수의관들과 미래의 후배님들을 위해 미흡한 글을 써보기로 한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과거를 갈무리하고 다음을 위한 초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1. 훈련

“내가 멘 군장의 무게는 아버지의 어깨보다 가볍다”

17년 2월, 대학 6년의 결과물인 졸업식도 가지 못하고 학교 동기 4명과 함께 괴산의 육군학생군사학교로 향했다.

입소시간이 되어 모인 우리들은 빡빡이가 된 서로의 머리를 비웃으며 줄을 맞춰 섰고, 그곳에는 같이 입대한 군의관 포함 800여명이 긴장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결혼을 한 사람도 있었고, 아이와 이별하는 사람도 있었고, 함께 온 연인에게 헤어짐의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

첫 소대를 배정받고 생활관에 들어갔을 때, 어색한 분위기는 잠시 뿐 우리는 모두 입대의 아픔(?)을 공유하며 금방 친해졌다.

괴산과 대전에서 약 9주 간의 훈련 기간을 거치며 진정한 군인이 되어가는 모습이 낯설기만 했다. 점심을 먹고 어떤 군가를 부를지 고민하고, 연등 시간에 수의업무교본을 보며 공부하는 모습이 스스로에게도 생소했다. 한편으로는 밖은 탄핵 시국으로 어수선했는데 오히려 군대에 있었던 것이 마음이 평안했다.

운동을 좋아했기에 개인 정비 시간 동안 체력단련에 집중할 수 있었고, 밖의 큰 주제보다는 같이 입대한 동기들과의 우정을 다지며 좋은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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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의 절정은 유격과 행군이라고 들었다. 아무리 의무수의사관의 훈련강도가 낮고 한참이나 어린 조교들이 우리를 배려했지만, 국가시험를 마치고 쇠약해진 우리들은 그마저도 버티기가 힘들었다.

유격훈련에서는 근육의 과한 젖산 축적으로 인해 열외를 하고, 행군에서는 만반의 준비를 했음에도 발에 물집이 잡히고, 흘러내리는 철모는 땀에 젖어 축축했다.

군장에 박스를 넣어 무게를 가볍게 하고 위에는 모포를 씌워 위장하는 꾀를 부리기도 했다. ‘내가 멘 군장의 무게는 아버지의 어깨보다 가볍다’라고 적힌 괴산언덕의 푯말처럼, 말 그대로 내 어깨는 진짜로 가벼워진 셈이다.

완전 군장을 하고 행군을 완주한 동기들에게는 민망하지만, 덕분에 발목과 무릎은 부상을 면할 수 있었다(완전 군장으로 40km 행군을 완료한 전우들 존경합니다).

대전국군의무학교에서는 예방의학의 실전 적용을 몸소 배울 수 있었다. 방역기로 모기를 쫓아내고, 식품 검사용 배지를 직접 만들어서 세균을 배양해 보기도 하면서, 군대에서의 위생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사단에는 수의관이 한 명이기에, 식품위생을 소홀히 할 경우 대규모 식중독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여름철 최전방에서 발생하는 말라리아의 매개체 동정을 치료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말라리아 근절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느꼈다.

임상에 대한 경험과 실무를 쌓기에는 부족하다는 감이 있었지만, 수의사의 일은 임상이 전부가 아니기에 이것도 경험해보자라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임했다.

대전에 철쭉이 아름답게 필 무렵, 우리는 각자의 초임지를 배속 받고, 떠나는 날만 기다리며 시간을 보냈다. 9주간의 훈련기간이 길다고 느껴졌음에도, 정들었던 동기들과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각자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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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대 생활 (의무학교, 해외파병, 의학연구소)

여러 수의관과는 다르게 나는 한 번도 육, 해, 공군에 속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 경험이 다수의 공감은 얻지 못할 것을 안다.

그러나 항상 새로운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겪은 경험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후배님들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아내는 작은 아이디어라도 주었으면 좋겠다.

2.1 의무학교에서 파병으로 – ‘주어진 길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자’

의무학교는 장기 수의관들이 갓 임관한 후배 수의관들이나 의무병, 수의병들에게 수의업무 및 예방의무를 교육하는 중요한 장소였다. 그런데 갓 임관한 내가 이 곳에서 다른 친구들을 가르쳐야 하다니..무거운 책임감과 불안감이 출근 첫 날부터 나를 짓눌렀다.

돌이켜보면 이 때 가장 힘들었다. 임상·비임상을 제대로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더욱이 군대에 대한 전문 지식이 전무한 수의사가 누굴 가르칠 수 있을까.

수업시간에도 교육생들의 질문에 ‘그건 괜찮아~’라고 얼버무리던가 ‘다음에 다시 알려줄게’라며 대답을 회피하기 일쑤였다. 수업을 마치고 오면 ‘내가 잘 하고 있는 건가’라는 회의감이 들었고, 더욱 자신감이 떨어져갔다.

그 때 선임으로 있던 성경용 교관님의 조언을 많이 받았다. 특유의 미소와 화법으로 바닥에 있던 나의 자존감을 끌어올려 주시고, 함께 야근을 하며 수업 내용을 지도해주셨다.

덕분에 이 후에는 즐겁게 수업에 임할 수 있었고, 교육생들의 만족도도 올라갔다. 누군가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수업은 나에게도 값진 경험이었다.

확신을 갖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분야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깨달았고, 교육생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이 경험은 이 후 파병과 국군의학연구소에서 진료를 할 때 나의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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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10월, 나는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수업은 익숙해지고, 교육생들만 바뀌고 매번 같은 내용을 가르쳐야 했기에, 익숙해진 일상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임관 후 바로 시작한 교관이기에 실무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이론만으로 익힌 지식에 한계를 느끼고 있던 중, 해외파병 공고가 났다. 군대에 입대한 처음부터 강력하게 지원을 희망했지만, 지원 시기를 놓쳐 그쳐 마음 속에만 자리잡고 있었던 파병이었다.

그런데 하늘이 도왔는지, 앞서 합격했던 지원자들 모두 파병을 취소하고, 그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이번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원을 해 몇몇의 지원자들과 경쟁을 했고, 다행히 파병부대 소집 전 합격했다.

‘운이 좋아서 파병됐다’는 말을 들었을 때 크게 부인을 할 수는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내려고 노력했기에 이러한 운을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가 교관 임무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면 파병의 추천도 받지 못했을 테고, 평소 파병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며 공고를 예의주시 하지 않았더라면 추가 모집의 기회도 놓쳤을 것이다.

군대에 온 순간, 자원 입대를 했건 차출되어서 왔건, 3년의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다. 수의관 후배님들이 군대에 입대한 것을 후회(?)하기 보다는,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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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해외 파병 – ‘남들과는 다르게’

레바논에는 이미 10여년 동안 한국군이 파병을 이어왔다. 그래서 나는 이곳의 수의관 업무가 매우 효율적으로 되어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수의관 한 명의 몫으로는 부담이 큰 일들이 많았다. 의무대에서 수의사의 일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이 수의관 한 명뿐이기에 임상, 비임상, 행정을 하는 법을 모두 익혀야 했다. 무엇 하나 자신이 없던 차여서, 파병 1일차부터 멘붕(?)이 왔다.

식품검사를 해본 건 훈련생 때 이외에는 책이 전부였기에, 첫 날 식품 검사를 한국에 있는 수의관 선배와 영상통화를 하며 진행했다. 이후 진료를 볼 때에도 부족한 것들이 있으면 한국의 선배들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 명분의 수의사 역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내가 가서 모든 일들을 진행했다는 게 부끄럽지만, 그곳에서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한국의 수의사 선배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자존심 따위를 고민할 수 없었다.

특히나 진료에 관한 지식들을 많이 물어봤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밤낮으로 전화해서 물어봤고, 부족한 자료들을 부탁했다(힘든 시기에 도움을 주신 오선영, 조동철, 박경국, 노영혜 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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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은 한국과는 전혀 다른 나라인 것 같지만 매우 친숙했다. 강국의 지배를 받은 역사가 있고, 내전을 겪고 있으며, 사람들은 정이 많고, 다양한 종교가 존재한다(이슬람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기독교, 정교회 등 종교적 개방성이 높다).

따라서 걱정했던 것과는 다르게 쉽게 주민들과 친해질 수 있었고, 그들의 문화에 대해 경험할 수 있었다. 아침으로 훔무스(hummus)를 먹으면서 레바논 문화를 익히고, 레바논 및 다른 나라의 군인들과 함께 농구경기를 하면서 각 군을 대표하여 교류를 진행했다.

단순 여행만으로 한 국가를 경험한다면 단편적인 모습만을 보고 그 나라를 특정 짓기 쉬운데 이런 다양한 교류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더 넓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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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FIL은 40여개의 국가가 각국의 군인들을 보내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수의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프랑스 수의사와 함께 중성화수술을 해 지역 TNR사업을 돕고, 수질검사를 담당하는 중국인 수의사와 만나 각국의 수의관이 가진 역할과 중요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군내에서 수의관의 역할은 식품 및 수질 검사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차지하며, 위생분야에 있어서도 강력한 권한이 있었다. 고향에 있는 동기들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군생활의 절반 가까이 되는 16개월이라는 시간을 파병으로 보냈다. 300여명이 제한된 공간에서 지내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었고, 새벽에 가족과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를 걸면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때도 있었다. 모든 것이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절대로 잊지 못할 추억이 된 것만은 확실하다.

파병처럼 다른 국적을 가진 수의사들을 만날 기회를 가지길 강력하게 추천한다. 단순히 수의학의 발전 정도를 비교하는 것을 넘어, 수의사들의 가치관, 동물에 대한 생각 등을 주고받으며 견문을 넓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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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국군의학연구소

파병 복귀 후 군생활의 마지막 부대는 대전의 국군의학연구소였다. 사실 파병복귀자는 부대 선택에 대한 제약이 없다시피 하기에 서울이 가까운 부대로 갈지, 대전으로 갈지 정말 심각한 고민을 했다.

결국 대전을 결정하게 된 건 떠나기 전 박경국 대위와 한 약속. “무조건 형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올게요.”

이 곳에서의 1년의 시간 동안 나는 사실 수의관이 꿀빤다(?)는 말을 절대로 믿지 않게 되었다. 갑작스럽게 터지는 식중독 사건들과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수질검사, 정기 군견 진료 및 수술, 응급상황 및 입원 관리까지. 센터장인 방기만 소령과 동물의학과장인 박경국 대위의 엄격한 지도 아래 나는 매일 말라갔다.

자체적이지만 강한 압박으로 운영하는 세미나와 스터디, 당직들이 내가 생각한 여유 있는 수의관의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런데도 이 곳은 다른 곳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었다. 장기 수의관은 단기들을 배려하며 부대의 임무와 발전방향으로 올바르게 지도하고, 단기 수의관은 서로 협력하여 임무를 실행하고 차후 전역을 위한 자기 발전에도 힘을 가했다. 이 곳에서 뜻을 모은 단체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 느낄 수 있었다.

국군의학연구소의 시설은 CT도입의 쾌거 등을 이루어 냈으며, 차후 동물병원 리모델링을 통한 규모의 확장에도 노력을 가하고 있다.

30~40kg의 대형견이 주요 환자여서 한국의 반려동물 시장에서 많이 접하기 힘든 셰퍼드와 말리노이즈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진료에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었기에 서로를 도와가며 관심 분야를 깊게 탐독할 수 있었다.

임상을 원하는 수의사들이 군대에 와서 시간을 날린다고 하기 쉬운데, 이곳에서 진료를 보며 임상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소득이었던 것 같다(공군 수의관들도 이곳에 와 함께 진료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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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회의 수의관

‘너도 (장기로 남지 않고) 전역했으면서 수의관이 좋다고?’라고 비판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많은 기회’가 있다고 후배님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실제로 한 동기는 3년 동안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과정을 거의 끝냈고, 식품검사대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인천국제공항에 취직한 동기도 있었다. 복무연장을 신청하여 학비와 연구비를 지원받으며 대학원을 병행하는 친구도 있었다. 일과 이후 시간에 골프를 치면서 수준급의 실력으로 성장한 친구도 있었다.

각자가 원하는 방향은 달랐지만, 내 주변에는 수의관 생활을 의미있게 보내려고 부단히 노력한 친구들이 있었고, 3년이 지났을 때 이들은 만족의 웃음을 띄며 부대를 떠났다.

나도 처음에는 군생활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지만, 군생활 하면서 만난 인연들이 매우 큰 도움이 되었고, 지금도 그 인연들을 이어가고 있다. 이왕 수의관이 되었다면, 회의적으로 현실에 안주하기 보다 안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찾았으면 좋겠다.

 

4. 수의병과를 돌아보며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주변의 상황을 들었을 때 단기 수의관들은 자신의 상관인 장기 수의관들에게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군대를 ‘의무복무’로 여기고 있는 단기들은 군대가 ‘직업’인 장기들과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기에, 대다수의 단기들은 3년이라는 시간을 사회로 복귀 할 때를 대비한 휴식 및 준비의 시간으로 여긴다.

누군가는 대학원의 문을 두드리기도 하고, 누구는 월급을 알뜰하게 모으고, 누구는 대학 6년의 보상으로 다양한 경험을 위해 휴식하기도 한다.

이 기간에 조직을 위한 희생이 개인의 가치 보다 강조되는 군대의 분위기는 단기 복무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더욱이 실무자의 입장에서 일의 부담이 커질 때 이 감정은 더 커진다.

부서의 알력에서 밀려 일을 떠맡게 될 때, 장기 수의관들이 단기 수의관들을 보호해 주지 않으면 단기 복무자는 의지할 곳을 잃게 된다.

아침 일찍 출근해 도무지 수의관의 일이라고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장기 복무자들이 세심하게 신경 쓰고 보호해 주지 못한다면, 중위로 갓 임관한 단기 복무자원들은 앞으로 더욱 수의관 본연의 임무보다는 관련 없는 일들에 출중한 역량을 낭비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러한 제도적 배려가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무조건 해야 했던 당직들이 사라진 곳들도 있고, 휴가나 자기발전을 배려해주는 장기 수의관 분들도 계셨다.

군대 내에서의 수의관 임무가 주로 임상 보다는 예방의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공군 수의관이나 군견훈련소, 국군의학연구소 등의 일부 기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단기수의관은 주 임무가 공중보건검사다.

그러나 아직도 방역을 할 때 방역장교라고 불리는 수의관들이 있고, 이는 수의사관으로 임관한 수의사들에게 굉장한 상처다. 심지어 내부에서조차 아직 수의관이라는 단어가 정착되지 않았다.

이러한 인식의 개선이 장기 수의관 주도하에 이루어 지지 않는다면 단기 수의장교들이 가지는 군대의 신뢰감과 긍정적인 마음은 회복되기 어려울 것이다.

전 병과장이신 조재기대령님과 대한수의사회에서 회의를 마치고 대전으로 내려오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군대에서 3년을 보내는 걸 억울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을 본받고 너 만이 해낼 수 있는 길을 가라. 군대를 값지게 여기는 순간이 찾아올 거다.”

3년이 지난 지금 나의 군생활에는 감사가 가득하다. 이 3년의 경험과 추억을 바탕으로 이제 새롭게 시작하는 수의사로서 나의 삶을 멋지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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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수의관 3년을 마치며/김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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