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학교 수의과대학(이하 수의대) 설립 추진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습니다.
2020년 이후 줄곧 수의대 신설을 추진하고 있는 부산대학교 측은 수의대 설립 필요성에 대한 근거로 지역균형과 가축방역관 부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대한수의사회를 비롯한 수의계는 경상국립대 수의대의 존재 (그리고 경상국립대-부산대간 상호 협약 파기), 우리나라의 수의사 공급 과잉을 근거로 내세우며 강경대응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산대학교’라는 현재의 쟁점에서 한 걸음 물러서서 보면, 수의대 신설 시도라는 사회적 도전에 대한 대응은 부산대 하나만 반대해서 잘 막아내면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2005년 공주대학교 수의대 신설 시도, 2017년 차병원 수의학과 개설 검토 지시, 2020년 이후 부산대학교까지, 수의대 신설 시도는 지역이나 상황을 가리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습니다.
하나의 대형 사고가 발생하기 전엔 그와 관련된 사소한 사고와 징후들이 발생한다는 하인리히의 법칙을 생각해 본다면, 가까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어떤 방법으로든 수의대가 신설되고 지금보다도 더 큰 규모의 신규 수의사가 배출되는 상황이 절대로 오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요?
# 미국식 접근법
최상위 행정부인 농식품부로부터 일선 수의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수의계는 기초 통계의 확보와 현황 조사에 대한 관심도 지원도 전무하다시피 합니다.
‘국내 반려동물 숫자는 총 몇 두인가’라는 기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도 없어서 기관마다 시장마다 각자 필요한 수치를 가져다 씁니다.
반려동물 총 숫자에 대한 기초자료가 행정부처 사이에 2배씩 차이가 나는데, 공직사회에서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자료의 생산과 관리에 대한 무관심은 공직사회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수의사의 현황파악을 위한 신상신고는 수의사법에 따른 조사임에도 일선 수의사의 적극적인 참여나 협조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다 수의대 신설 시도같은 굵직한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부랴부랴 수의사 공급이 과잉상태라는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수의사 수 대비 반려동물 수를 국가별로 비교한 표’를 20년째 전가의 보도처럼 가져옵니다.
숫자에 밝은 누군가 “자세히 살펴보니 당신들이 가져온 반려동물 수는 다 엉터리 추산치네요. 그런 통계를 어떻게 정책결정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까?”라고 지적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수의사 수급의 평가와 관리에 대해서는 참고할 만한 미국의 사례가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National Research Council (NRC, 국립연구위원회)에서 장기간에 걸친 수의학 분야의 인력 변화, 그리고 세부 분야별 수의료서비스 수요를 평가해 ‘수의학 분야의 인력 수요(Workforce Needs in Veterinary Medicine, 이하 본 문헌)’라는 출판물을 발간한 바 있습니다.
미국수의사회(AVMA), 미국동물병원협회(AAHA), 미국수의과대학협회(AAVMC)를 비롯한 주요 단체가 협력해 NRC에 요청한 이 연구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에 걸쳐 조사한 각종 통계, 서베이 자료들을 망라하고 2016년까지의 미국 내 수의사 인력 장기 추세를 조망합니다.
또한 수의사 수급에 대한 조치가 반려동물 보호자 및 산업의 실제 노동력 수요 추계, 개별 동물병원의 경제적 상황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데이터, 수의학 교육의 퀄리티와 경제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합리적인 근거에 기반해 밝히고 있습니다.
# FTE를 활용한 수의사 수급 평가
본 문헌에서 수의사 수급을 평가할 때 특이한 점이 있다면, 소동물 수의료서비스 수요를 산출할 때 미국 내의 전체 인구수와 인구 1인당 연간 동물병원 방문 횟수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2016년의 경우 미국 전체의 (예상) 인구수와 1인당 연간 동물병원 방문 횟수(0.6회) 추계에 따라 소동물 수의료서비스 내원 수요를 207,742,496 pet visits으로 추산했습니다.
그리고 수의료서비스 공급과 수요 추계를 비교할 땐 ‘FTE(Full Time Equivalent, 한 사람의 풀타임 임상수의사가 1년간 제공하는 수의료서비스의 공급)’ 단위로 환산해 평가합니다.
임상수의사가 상황에 따라 대/소동물을 모두 진료하기도 하고 파트타임으로 근무하기도 하는 등 사람마다 실제로 공급가능한 수의료서비스의 양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죠.
본 문헌에서는 미국 내 소동물 임상수의사가 1주일간 커버하는 진료건수의 조사 결과(70~87회) 및 연간 실질 근로주수(45~47주)의 범위를 적용해, 2016년에 필요한 서비스 수요를 50,805 FTE에서 65,950 FTE 사이로 추산했습니다.
반면 예측된 서비스 공급은 51,445 FTE로, 수의사 1인당 진료 효율이 악화될 경우 반려동물 임상계가 단기적 인력 부족 상태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습니다.
# 우리나라와 비교한다면
이왕 본 문헌에 대한 소개가 나왔으니, FTE 기준 추산 방식을 국내에서 확보가능한 통계에 적용시켜보겠습니다.
우선, 2020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20년 11월 기준 우리나라에서 반려동물 키우는 가구수는 312.9만 가구로 전체 가구수 2092.7만 가구의 15%에 해당합니다.
KB경영연구소의 ‘2021 한국 반려동물보고서’에 따르면, 반려동물 보호자의 연간 동물병원 방문횟수는 평균 2.59회입니다.
전체 가구수 대비 반려동물 키우는 가구수의 비율(15%)를 감안해, 이를 우리나라 전체 인구 1인당 연간 동물병원 방문 횟수로 환산하면 0.37회입니다.
2020년 11월 우리나라의 인구수(약 51,840,000명)를 참조해 소동물 수의료서비스 수요를 본 문헌 방식으로 추산하면, 전국적으로 내원 수요는 19,180,800 pet visit입니다. 필요한 수요는 4,690 FTE에서 6,089 FTE 사이로 추산됩니다.
그리고 대한수의사회에서 2021년 2월 발표한 반려동물 임상수의사수 현황을 참조하면 공급량은 6,250 FTE(혼합동물 수의사는 0.5 FTE로 계산했을 때)입니다.
즉, NRC 기준으로 가장 관대한 지표를 적용하더라도 우리나라 반려동물 임상수의사는 작년에 이미 공급 과잉 국면에 들어갔습니다.
부산광역시의 경우 본 문헌 방식을 적용하면 2020년 기준 1,255,020 pet visit의 내원 수요가 발생하며 필요한 서비스 수요는 307 FTE에서 398 FTE 사이로 추산됩니다.
부산의 경우 지난 2018년에 이미 활동 임상수의사 숫자가 406명이었던 것으로 조사된 바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전국적으로 보든 부산광역시를 떼어놓고 보든 상관없이 현 시점의 수의료 서비스 공급은 전혀 부족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미국의 동물병원들에 비해 우리나라 동물병원들의 실질 영업시간이나 근로주수가 훨씬 길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FTE로 보이는 것보다 오히려 실제 과잉공급 규모가 더 클 수 있는 상황입니다.
수의계가 직면한 더 큰 문제는, 세계 경기가 빠르게 수축하고 있는 가운데 매년 새롭게 공급되는 수의사 규모가 앞으로도 줄어들지 않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 비슷한 문제, 다른 대처
단순히 미국식 수요기반 수급모형이나 FTE 단위를 수입하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닙니다.
미국은 미국 내의 상황에 맞춰 가장 적절하다고 합의된 방식으로 평가한 것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의 고유한 제도와 실정이 있으니까요.
수의사라는 특수한 직역의 인력 수급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 우리나라와 미국이 가장 다른 점은 바로 문제를 파악하고 관리하는 방식입니다.
미국은 단기적으로 수의사 부족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해서 무턱대고 대학 신설을 유도하자는 식의 처방을 내놓지 않습니다.
수의사가 사회에 전달하는 가치를 중심으로, 이 가치의 질적 하락을 유발하지 않으면서 공급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어떠한 사회적 투자와 직역 내외부간 협조가 필요한지, 현업에 있는 사람들의 인식과 실질적 처우수준은 어떤지, 하나의 세부직군에 사람들이 몰리거나 빠져나간다면 원인은 무엇인지 상세히 조사합니다.
모든 과정에서 수치로 산출된 조사 결과뿐만 아니라, 상세한 조사 과정과 방법까지 시민사회와 투명하게 공유합니다.
이 과정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해관계자간 설득도 필요했을 것이고, 엄청난 시간과 자원이 투입되었겠죠.
하지만 장기간에 걸친 호흡으로 조사와 분석작업을 수행하고 발전적인 논의를 위한 기초자료를 남겨놓았습니다. 그것이 본 문헌의 요지이자 존재 의의입니다.
이에 비하면 우리나라 수의계는 장기적인 수의사 수급정책에 대해 아무런 비전도, 공식 입장도, 실태 조사와 기초 자료도 없는 상태입니다.
수급을 변화시키려는 쪽이나, 현상을 유지하려는 쪽이나 그때그때의 자기네 손익을 따져서 엉성한 자료를 취사선택해 소모적인 논쟁과 기싸움을 벌입니다.
밖에서 보면 전후사정이야 어떻든, 수의사 집단이란 밥그릇을 위한 이전투구에만 골몰하는 사람들로 비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수의계를 향해 반복해서 날아드는 사회적 요구들을 복불복 게임이나 밀린 방학숙제하듯 운 나쁘게 걸린 사람들이 어찌저찌 해치우기만 하면 좋은걸까요.
우리가 미국수의사들에게 배울 점은 단지 임상수의학적 술기나 학문적 지식들이 전부인 것인지, 부산대 수의대 신설 시도를 계기로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엠디티 데이터랩(iamdt d.LAB)은 벳아너스 얼라이언스의 EMR 데이터와 각종 통계 데이터를 바탕으로 동물병원 경영과 반려동물 산업에 도움이 되는 인사이트를 도출합니다(문의 hyde@iamd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