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안락사,PTSD에 포함되도록 수의학계 노력 필요˝
김은영 서울대 정신건강센터 교수, '수의사의 정신건강 관리' 주제로 특강
한국임상수의학회(회장 김남수) 2021년 춘계학술대회가 22일(토) ZOOM을 통한 온라인 학회로 개최했다. 이번 학회에서는 특별히 서울대 정신건강센터 김은영 교수가 ‘수의사의 정신건강 관리’를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김은영 교수는 수의과대학에 정신건강 관리 과정을 포함하고, 동물 안락사 행위를 PTSD에 해당하는 트라우마로 볼 수 있도록 수의학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수의사, 일반인보다 심한 스트레스 2배 받고, 자살 생각 3배 더 많이 해
2014년 미국에서 조사된 연구에 따르면, 수의사는 일반인에 비해 심한 스트레스를 약 2배 더 받고, 우울 삽화를 약 1.6배 더 경험하며, 자살사고를 3배 가까이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성수의사는 남성수의사에 비해 모든 면에서 더 높은 자살 위험 요소를 경험하고 있었다.
*남성수의사 VS 여성수의사 – 심한 스트레스 6.8% VS 10.9%, 우울 삽화 경험 24.5% VS 36.7%, 자살사고 14.4% VS 19.1%
수의사의 자살 사망률도 일반인보다 높았다. 남성수의사는 일반의 3~4배, 여성수의사도 2배 정도 자살로 인한 사망비율이 높았다.
지난해 발표된 다른 연구에서도 자살을 생각해 본 수의사가 일반성인보다 2배 이상 많았다는 결과가 확인된 바 있다(2020 수의사 웰빙 연구). 구체적인 자살 계획을 세웠던 수의사도 약 1.7배 많았으며, 실제 사살을 시도한 수의사는 무려 2.7배 많았다.
길고 과도한 업무량, 낮은 삶의 질, 보호자 스트레스
수의사의 스트레스 요소는 다양했다.
김은영 교수에 따르면, ▲긴 근무시간과 과도한 업무량에서 오는 피로와 번아웃 ▲일과 삶(가정) 불균형 ▲높은 교육비에 비해 낮은 소득 ▲직원 관리 등 관리 및 경영에 대한 책임감 ▲보호자 스트레스 등이 수의사의 스트레스 요소였다.
보호자와 관련해서는 ‘수의사의 능력에 대한 높은 기대’, ‘인터넷의 잘못된 정보의 오용-전문가 행세’, ‘수의사의 전문성에 대한 의심과 불만’, ‘무료 치료에 대한 요구와 거절했을 때의 도덕적 비난’ 등이 스트레스 요소가 될 수 있다.
의료환경의 동정피로(compassion fatigue)
상담사 등 다른 사람을 돕는 직업을 가진 서비스 분야 사람들은 동정피로(compassion fatigue, 공감피로)를 겪는데, 의료환경의 동정피로는 특징이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의료환경에서는 죽음, 질병 등 고통스러운 감정이 수반되는 상황을 마주하기 때문에 쉽게 불안해질 수 있고,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할 수 있다고 한다.
고통받는 상황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 극도의 피로감을 유발하며 점점 무뎌지고 무감각해지면서, 정서적 소진, 무심함, 낮은 성취감을 보일 수 있다.
보호자와의 대화는 특히, 단순한 공감적 반응이 아니라 나쁜 소식(중증질환 등)을 전하거나 어려운 결정(안락사 등)을 내리도록 하는 상황도 있어서 수의사에게 더 어렵게 다가올 수 있다.
나쁜 소식을 많이 전달하다 보니 정서적 소진이 야기되고, 수의사의 진단과 치료가 저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험은 번아웃 증후군(소진 증후군)으로 이어질 수 있다.
“수의과대학 교육과정에 스트레스 관리 등 정신건강 과정 포함해야”
김은영 교수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스트레스 관리·마음챙김 방법을 자세하게 소개한 것은 물론, 수의사의 스트레스 관리를 위한 학교의 노력을 주문했다.
김 교수는 “수의사의 스트레스 관리에 관한 내용이 수의과대학 교육과정에 포함되어야 필드에서 일할 때 감정을 잘 해소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전했다. 또한, 스트레스 관리는 물론, 생명·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철학적, 심리적, 윤리적 문제를 다루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수의과대학 학부 과정에 이런 논의가 없다면, (수의사가 된 뒤) 갈등이 생겼을 때 회피하거나 기계적으로 감정 없이 의료행위를 하는 등 미성숙한 방어기제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었다.
실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는 의예과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워크샵 형태의 과정을 진행한다. 정규 교과목으로 운영할 경우, 학생들이 공부로만 접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워크샵에서는 소통, 설득, 사과 등 상대방의 감정을 어떻게 인지하고 공감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고 한다.
수의사의 정체성에 위배되는 안락사·살처분, 의사는 경험하지 않는 것
‘안락사로 동물의 고통을 정상적으로 완화하면서, 내 고통도 이렇게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
당하는 트라우마가 아니라, 내가 하는 행위로 경험하는 트라우마
김은영 교수는 ‘동물 안락사 행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소개했다.
안락사는 안락사 행위 자체가 초래하는 불안과 우울은 물론, 수의사의 정체성과 주요 방어기제(생명을 살리는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를 무력화할 수 있는 행위로 더 강력한 불안과 긴장을 야기할 수 있다. 환자의 죽음을 패배로 여기면서 내적 갈등이 유발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수의사는 안락사를 동물의 고통을 완화하는 ‘정상적이고 수용 가능한 방법’으로 교육받기 때문에, ‘내 고통도 이렇게 정상적으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부분은 (안락사를 수행하지 않는) 의사와도 다른 점이다.
김은영 교수는 가축 살처분 행위를 수행했던 공무원, 예산 때문에 건강한 동물을 안락사해야 하는 동물보호센터 수의사가 고통 받았던 일을 언급하며, 동물 안락사 행위가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지 설명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동물 안락사(살처분) 행위는 아직 PTSD에 해당하는 트라우마로 분류되지 않지만, 트라우마가 아니라고 보기 어렵다고 한다.
안락사 행위는 전쟁에서 군인이 상부 지시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것처럼, 트라우마를 겪는 경험을 당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수행하면서 경험하게 되는 스트레스(Perpetration Induced Traumatic Stress)와 유사하다.
김 교수는 “현재 수의사의 동물 안락사 행위는 트라우마에 속하지 않지만, 트라우마가 아닌 것도 아닌 상황”이라며 “PTSD에 포함해서 적극적으로 관리를 해야 한다고 수의학계에서 주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날 특강의 좌장을 맡은 김근형 충북대 수의대 교수는 “수의사는 행복한 직업이지만 어려움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수의사뿐만 아니라 수의대학생들도 힘든 상황에 처한 것 같은데, 모르고 넘어가고 잘 표현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며 “수의사가 이 내용을 알고, 스스로뿐만 아니라 주변 수의사들을 잘 챙겨줘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임상수의학회 2021년 춘계학술대회에서는 총 4개 분과에서 64개의 초록발표가 진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