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미국 UC Davis 수의과대학에서 예방수의학 석사과정(MPVM)에 재학 중인 필자는 올해 세계 수의역학∙경제학회(ISVEE 14)에 대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관련기사 : 2015년 11월 9일자 ‘세계 수의역학·경제학 학회, 멕시코 메리다서 열려’)
평소 역학에도 경제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UC Davis 수의과대학의 동물질병모델링∙예찰센터(CADMS)의 센터장을 맡고 있는 베아트리츠 마르티네즈-로페즈 교수님(본인의 지도교수이기도 하다)과의 면담을 통해 학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3년에 한 번 개최되는 수의역학 및 경제학 분야의 권위있는 학회인 ISVEE는 보통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나 교수들이 주로 발표하는 학회였다. 필자는 석사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구두발표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교수님은 흔쾌히 준비를 도와주셨다.
나의 발표는 ‘미국의 돼지 이동의 네트워크 구조분석과 PRRS 전파와의 연관성(Evaluation of the trade patterns and social network structure of pig movements in the US and their association with PRRSV transmission)’을 주제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몇 주에 걸친 짜임새 있는 예비연구 끝에 ISVEE 학회 측으로부터 구두발표 승인을 받아냈다.
유명 외국학회에서 구두로 발표하는 멋진 경험을 만들어보겠다는 야심 찬 출발과는 달리 막상 승인을 받고 나자 부담이 커져갔다. 발표를 준비하는 동안 필자는 ‘분석’에 있어 초보자라는 냉정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물론 이러한 한계점은 좀더 열심히 준비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동물수송과 네트워크분석에 관한 논문들을 찾아 정리하고, 현재 어디까지 연구가 되어있으며, 어떤 부분을 강조하여 발표하는 것이 좋을지 로페즈 교수와 함께 가늠해나갔다. 여름방학부터 통계프로그램 ‘R’을 기반으로 하나씩 분석결과를 만들어나갔고 그 내용이 실험노트를 빼곡히 채울 때쯤 15분의 발표를 위한 내용을 선정했다.
그렇게 몇 달의 준비를 끝내고 로페즈 교수와 필자 그리고 4명의 CADMS 대학원생들은 ISVEE 14가 열리는 멕시코 메리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도착해서도 발표 직전까지 동료들과 내용을 다듬었다.
그렇게 2015년 11월 4일 오후 4시 30분경 세계 수의역학 전문가들 앞에서 첫 국제학회 구두발표에 나섰다.
나의 발표는 돼지의 수송빈도가 높은 농장일수록 PRRS 발생빈도가 높을 것이란 단순한 가설에서 시작했다.
이를 위해 미국의 한 양돈회사가 운영하는 500여 농장을 대상으로 지난 4년간의 돼지수송과 200여회의 PRRS 발생 데이터를 분석했다. 유전자 변이가 심한 PRRS의 특성을 고려해 단순 PRRS 발생빈도가 아니라, 특정 주(Strain)의 바이러스를 선정함으로써 더 정교하게 농장간 전파여부를 평가했다.
먼저 모돈농장인지 비육돈농장인지 여부도 PRRS 발생과 밀접한 연관성을 보였다. 때문에 오직 수송빈도와 특정 주의 PRRS 발생빈도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위해 동일한 역할을 하는 농장의 수송빈도로 범위를 좁혔다. 하지만 분석결과 높은 연관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반면 초기 발생농장들과 특히 긴밀하게 연결된 농장들을 ’Walktrap community finding algorithm’이라는 네트워크 분석기법을 통해 별도의 그룹으로 만들었다. 특히 전파 위험도가 높은 이 그룹 내부에서의 수송빈도를 다시 파악한 결과 PRRS 발생빈도와 유의성 있는 연관성을 보였다.
즉, 단순히 모든 농장 간 네트워크의 수송빈도를 PRRS 전파 예측에 활용하는 것 보다, 우선 초기 PRRS 발생농장과 밀접하게 연결된 농장의 그룹을 파악해 범위를 좁히고, 그 그룹 내에서 수송빈도를 파악하는 것이 PRRS 전파예측에 효과적임을 발견했다.
5일간 참여한 ISVEE 14에서 세계 수의역학의 연구범위와 수준에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필자도 나름 몇 개월 간 빈틈없이 준비해서 발표했다고 생각했지만, 타 연구자들의 발표 수준은 나의 예상보다 더 높고, 더 깊이 있고, 더 다양한 분야를 다뤘다.
특히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가 커 수의역학의 중요도가 더 높은 산업동물 분야에서는 최고 권위의 연구자들이 펼치는 새로운 역학분석 기술들과 깊이 있는 해석이 눈에 띄었다. 역학적 분석을 바탕으로 한 경제학적 해석결과들은 수의역학 분야가 가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또한 ISVEE 학회에서 수의역학은 산업동물에만 국한된 질병에 그치지 않고 인수공통전염병이나 원헬스(One-Health) 측면, 기후변화, 반려동물과 동물복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울렀다.
수의역학은 어떻게 경제학과 접목될 수 있는가? 필자는 수의역학이 ‘효과적인 결정’을 ‘정량적’으로 연구하는 분야이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수의역학은 우리가 영향을 주는 요인과 잠재적인 외부요인들이 얼마만큼의 효과를 내는지 정량적으로 평가하고 통계학적으로 해석한다. 때문에 그 효과를 경제학을 활용해서 해석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특정 질병에 대한 예방 백신 정책을 예로 든다면, 예방 백신을 어떻게 실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지, 얼마만큼의 효과를 발휘할지 수치로 평가하고, 경제학적으로 얼마나 효율적인지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ISVEE 학회에는 수의역학 연구자나 경제학자 외에도 국가나 국제기구의 정책을 결정하는 수의관련 정책 담당자들도 많았다.
유학기간 동안 미국의 수의학을 경험하면서, 한국의 수의학이 많이 뒤쳐져 있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하지만 ‘무엇을 하는가’를 가르치는 교육에서 더 나아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를 가르치는 교육은 미국이 훨씬 앞서가고 있다고 느꼈다.
예를 들어 한국 수의과대학에서는 세균이 감염되면 항생제를 사용하고, 전염병이 발생하면 방역조치를 취하는 등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서 충분히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항생제를 어떤 농도로 어떤 시기에 투여해야 하는지, 방역조치를 어느 곳에 어떤 시기에 해야 하는지 등 상황을 분석하고 최적의 대응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부분에 대한 교육은 부족했다.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종합적 판단은 늘 나에게 어렵게 느껴졌다.
미국에서의 수업은 암기나 지식의 나열이 아니었다. 대부분 객관적이고 비판적으로 연구결과를 해석하고, 이를 평가하고, 토의하면서 효과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교육이었다. 이러한 교육은, 쉽게 마주하지만 대답하기는 힘든 궁금증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필자는 이러한 교육은 수의역학 분야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임상분야부터 연구분야까지 미국의 수의학자들은 수의역학 연구자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그들의 연구와 통계적 해석이 옳은지, 더 나은 방법은 없는지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자체 평가는 점점 쌓여 더욱 단단한 학문적 기반을 이루고 지금의 차이를 만들었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수의역학 교육이 강화되고, 역학이 타 수의학 분야와 소통하며 발전시켜 나간다면 한국의 수의학도 한 단계 더 진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더 발전된 한국의 수의학을 다른 세계 유명 학회뿐만 아니라 3년 뒤 태국, 6년 뒤 캐나다에서 열릴 ISVEE에서도 알릴 수 있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