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병원 수의사 86%가 동물학대 의심사례 마주친다
동물학대 의심사례 개입할 도덕적 의무 느끼지만 절반이 신고 주저..제도·교육 보완해야
국내 동물병원 수의사의 86.5%가 동물학대 의심 사례를 목격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조사에 응답한 수의사 대다수가 동물학대 의심사례에 개입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절반 이상이 당국에 신고하기를 주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고해봤자 소용없다’는 인식이 팽배한 것인데, 수의사들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법적·도덕적 의무에 대한 인식 개선, 수의법의학 교육 확대, 신고자를 보호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대 수의대 천명선 교수팀은 ‘한국 임상수의사들의 동물학대 케이스 개입 의사 분석’ 연구결과를 국제학술지 animals에 6일 발표했다.
매년 동물학대 의심사례 포착하는 동물병원 수의사가 86.5%
여성, 반려동물 임상, 젊은 수의사일수록 민감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동물학대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동물병원이다. 경험 있는 수의사라면 동물 환자가 의도치 않은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아픈 것인지, 아니면 물리적인 손상을 포함한 학대의 결과로 내원했는지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진은 “2013년부터 2018년까지 국내 동물학대 범죄는 3.3배 증가했다. 동물학대 문제를 목격하는 최전선에 있는 수의사에게 동물학대를 줄일 사회적 책무가 있다”며 동물병원 수의사가 마주치는 동물학대 의심사례와 이에 대한 수의사들의 인식, 대응 경향을 조사했다.
2018년 진행된 온라인 설문조사에는 반려동물·농장동물 임상수의사 593명이 참여했다.
이중 동물학대 의심사례를 목격했다고 응답자는 86.5%에 달했다. 이는 미국 수의사를 대상으로 한 연구결과(87%)와 비슷한 수준이다.
절반 이상인 59.6%가 ‘연1~3회 학대 의심사례를 만난다’고 응답한 가운데, 매달 의심사례를 본다는 수의사도 11%로 나타났다.
응답자들이 만난 동물학대의 유형은 주로 음식이나 돌봄, 치료를 제공하지 않거나 심지어 차거나, 던지거나, 태우는 등의 물리적인 손상을 포함했다.
연구진은 “여성, 반려동물 임상, 젊은 수의사일수록 동물학대 의심사례를 더 자주 목격했다고 보고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동물에 대한 태도나 경험, 동물복지 관련 교육수준에 따라 학대 의심사례를 포착하는 민감도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동물학대 관리 자기효능감 떨어지고 신고 주저..제도·교육 보완해야
의사에겐 법의학 교육, 학대 의심사례 가이드 제공..신원보장 법적 근거도
동물학대 의심사례에 대한 개입 수단으로는 신고보다 상담을 더 선호했다.
응답자의 74.6%가 관련 보호자를 상담할 의향이 있다고 답한 반면, 절반 이상은 당국에 신고하기를 주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고를 주저하는 이유로는 ‘신고를 해도 피학대동물의 안전과 복지를 보장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68.1%로 가장 높았다. 의심사례가 정말 동물학대인지 확신하기 어려움(29%), 고객 기밀 유출에 대한 염려(23.8%), 학대를 멈추고 피학대동물을 도울 방법을 잘 모름(21.3%) 등이 뒤를 이었다. 보복을 우려하는 응답자(4%)도 있었다.
연구진은 “수의사들은 동물학대 사례를 관리하는데 자기효능감(self-efficiency)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며 일선 수의사들이 동물학대 의심사례를 잡아낼 역량과 개입의지를 높이려면 교육과 인식개선,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목했다.
현행 동물보호법은 동물학대 의심사례를 목격한 수의사는 반드시 당국에 신고토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신고하지 않았을 때의 불이익이 없어 사실상 권고에 가깝다.
신고인의 신분 보장이나 신원 노출 방지도 규정되어 있지만, 이를 어겼을 때의 벌칙도 없어 일선 수의사가 기대기 어렵다.
반면 노인학대나 아동학대 의심사례를 신고한 의사의 신원노출금지 의무를 위반할 경우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학대 의심사례를 선별하기 위한 교육이나 제도적 지원도 미비하다.
국내 수의과대학에서 수의법의학을 교육하거나, 당국이 동물학대 의심사례를 가려낼 수 있는 별도의 가이드라인도 제공되지 않는다. 일선 수의사 개개인에게만 의존하는 셈이다.
반면 의사는 법의학 교육뿐만 아니라 의심사례를 구별하기 위한 도구를 마련하고 있다.
이미 2003년에 의협이 ‘아동학대 예방 및 치료지침서’를 발간했고, 보건복지부와 소아응급의학회 등이 함께 ‘의료인 신고의무자용 아동학대 선별도구(FIND)’ 체크리스트를 제공하고 있다.
천명선 교수는 “동물학대 사례에 수의사들의 적극적인 중재 활동을 위해서는 수의사의 법적·도덕적 의무에 대한 인식 개선과 함께 관련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수의법의학 등의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며 “신고를 주저하는 장벽을 극복하기 위해 피해자와 더불어 신고자(수의사) 역시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제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결과(An Analysis of Veterinary Practitioners’ Intention to Intervene in Animal Abuse Cases in South Korea)는 국제학술지 animals 온라인판(바로가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