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도 있는 말에게 복지도 있다’ 말 복지에 경마수입 활용토록 세제 개편해야
말 복지 포럼서 승용 전환 확대, 조기 순치, 메이저-마이너리그 도입, 축산발전기금 개편 등 제안
한국마사회가 10월 27일부터 29일까지를 ‘경주마 복지 주간’으로 운영했다. 27일 말 복지 포럼 개최를 시작으로 경주마 복지기금 출연식(28일), 퇴역 경주마 한정 경기(29일)가 이어졌다.
복지주간의 문을 연 말 복지 포럼에는 경마시행체(마사회)와 학계, 동물보호단체, 마주, 생산자들이 모여 말 복지 증진 방향을 논의했다. 퇴역경주마국제포럼(IFAR) 엘리엇 포브스 회장의 강연도 진행됐다.
용도가 있는 말에게 복지가 있다
퇴역마 승용 전환, 경주마 활동 기간 늘려야
말 복지의 화두는 은퇴한 경주마(퇴역마)다. 지난해 드라마 촬영 과정에서 사망한 말이 퇴역마였던 것으로 드러나면서 사회적 관심이 높아졌다.
말산업정보포털에 따르면, 2022년 기준 국내 퇴역마는 1,327마리다. 이중 승용·번식·관상·교육 등의 용도로 제2의 삶을 찾은 퇴역마는 755마리(57%)에 그친다. 나머지는 폐사했거나 용도가 정해지지 않았다.
포럼 발제에 나선 마사회 말복지센터 김진갑 센터장은 “말은 용도를 가지고 있는 한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다”면서 “어떻게든 용도를 갖게 하는데 (말 복지정책의) 방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퇴역마의 대표적인 용도는 승용마 전환이다. 엘리엇 포브스 회장은 “호주에서 2021-2022 시즌에 은퇴한 말의 68%가 승용마로 활용됐다”고 전했다. 2022년 한국 승용마 전환 비율(32%)의 2배가 넘는다.
한국도 승용 전환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시작했다. 은퇴한 더러브렛 경주마를 승용마로 활용하려면 적절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 마사회와 마주협회가 함께 조성하는 ‘더러브렛 복지기금’ 중 일부가 여기에 쓰인다. 올해 40마리에 두당 5백만원의 비용을 지원해 승용 전환을 시도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경주마로서의 활동기간을 연장하는 것도 ‘용도를 가진 말’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마사회는 훈련·경주 중 부상당한 경주마가 바로 은퇴하는 대신 수술·재활을 거쳐 복귀할 수 있도록 더러브렛 복지기금으로 재활기간 위탁관리비(6개월간 매월 120만원)를 지원하고 있다.
조기 교육이 곧 복지다?
메이저-마이너리그 도입 제안도
김병선 제주한라대 교수는 “어린 말일 때 순치조련이 잘 되면 경주마 생활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그런 말이 퇴역한 이후에도 승용마로 여생을 보낼 수 있다”고 지목했다.
사람과 친한 말이 되어야 경주마 활동기간도 늘어나고, 은퇴 후 승용마로 활용하기에도 적합해진다는 얘기다.
김병선 교수는 “각인순치, 전기육성이 제대로 안된 말이 후기육성 단계에 들어오면 조련사가 무리수를 두게 되고, 그 과정에서 말들에게 트라우마가 생긴다”며 “경주마 생활에도 영향을 미치고 건강이 약해지며, 퇴역시점도 빨라지게 된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각인순치가 현장에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후기육성 전 품평제·경매제 도입을 제안했다. 순치조련이 잘된 말이 업계에서 선호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다. 마사회도 말 복지정책 중 하나로 망아지 각인순치 연구를 제시했다.
경마에 메이저-마이너리그 체제를 도입하자는 아이디어도 눈길을 끌었다. 현재 공사 중인 영천경마공원이 문을 열면 리그 이분화를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능력이 조금 뒤쳐지는 말도 마이너리그에서 활약할 수 있게 하면 그만큼 경주마 활동기간도 늘릴 수 있다. 능력이 비슷한 말끼리 경주하면서 얻게 되는 박진감은 덤이다.
김병선 교수는 “현재 평균 2년 남짓인 경주마 활동기간을 3년 이상으로도 늘릴 수 있다”면서 “그만큼 애프터케어(퇴역마 관리) 부담도 줄고, 은퇴시점이 늦어질수록 어른 말이 되어 승용에도 더 적합해질 수 있다”고 기대했다.
조용학 서울마주협회장도 일본의 중앙경마장-지방경마장 분리 사례를 들며 리그 이분화 제안에 공감했다.
물통도 없는 마방..승용마 관리 기준·교육도 필요
퇴역마가 제2의 용도를 찾았다고 무조건 좋은 복지를 누릴 것이라 단정할 순 없다.
동물자유연대 부속 한국동물복지연구소(소장 이혜원)는 포럼 전날인 26일 ‘승마체험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를 발간했다. 경기도와 제주도의 승마장 48곳을 무작위로 선정해 승용마의 건강상태와 사육·체험시설 관리 실태 등을 현장 조사한 결과다.
이혜원 소장은 “승마장마다 사양관리, 사육환경이 천차만별이었다. 좋은 승마장과 열악한 승마장의 편차가 너무 컸다”면서 “물도 없고 울타리까지 부서진 마방도 많았다”고 지적했다.
특정 승마장에 있는 말들이 말이력제 상에서는 다른 목장에 있어야 할 말이었던 경우도 확인됐다. 이력관리가 아직 명확하지 못한 셈이다.
이혜원 소장은 “(승용마 관리에 대한) 법적인 최소기준이 없는 것도 문제다. 관련 법 개정이 필요하다”면서 “승마장 종사자에 대한 말 복지 교육도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경주마들이 번 돈은 소·돼지·닭이 쓴다
마사회 수익이 말 복지사업에 쓰이도록 법 바꿔야
한국마사회와 마주들은 2023년부터 5년간 매년 10억씩을 출연해 더러브렛 복지기금을 조성하고 있다.
기금은 퇴역마의 승용전환이나 경주마 재활휴양 지원, 승용마전환 승마대회 개최 등 다양한 복지사업에 쓰인다.
하지만 충분치 않다. 조용학 회장은 “매년 퇴역마 1,300여마리가 발생하는데 반해 복지기금의 수혜를 받는 말은 2023년 기준 70여마리에 불과하다”면서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말 복지 지원을 위해서는 법적 구속력이 있는 재원확보 방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마사회가 수익금의 70%를 축산발전기금으로 내고 있는데, 말산업을 위해 집행된 축산발전기금은 2%에 그친다는 것이다.
이원복 한국동물보호연합 대표도 “말들이 벌어온 돈은 (정부가) 다 가져가 버린다. 소, 돼지, 닭에게 쓰이고 말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구조를 해결하지 못하면 말 복지는 요원하다”고 꼬집었다.
조용학 회장은 축산발전기금의 일부가 말 복지를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운영 규정을 바꿔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익금을 말복지사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한국마사회법을 개정하자는 것이다.
김진갑 센터장은 “안정적인 재원 확보를 위한 노력이 장기적으로 필요하다”면서 “오늘 논의된 안건을 단기·중장기 과제로 구분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엘리엇 포브스 IFAR 회장은 “(말 복지 증진에) 천편일률적인 명답은 없다. 나라마다 상황이 다르지만, 중요한 것은 실천하겠다는 의지”라며 “퇴역마 관리에 경마산업의 이해관계자들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윤민중 경북대 교수는 해외의 말 도축장 폐쇄가 주변국으로의 원정 도축으로 귀결된 사례를 들며 말 복지 관련 규제를 논의할 때는 말산업 전반에 미칠 영향을 심도 있게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윤 교수는 “말을 잘 이해하고 있는 말산업 경영체와 관계자가 논의를 주도해야 한다”며 “기본적인 말 복지 구현을 위해서도 말산업 경영체의 경영 안정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