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북 안동 산불 피해 현장을 다녀왔습니다.
안동 시내에 들어서자 산불은 이미 진화되었지만, 매캐한 연기 냄새가 여전히 코를 찔렀습니다. 택시 기사님께서는 산불이 가장 심할 때는 마스크를 써도 숨쉬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말했습니다. 산은 잿더미로 변해 있었고, 불에 탄 나무들과 집터는 그날의 참혹했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산불로 인명 피해는 물론,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동물들의 희생과 피해도 상당했습니다.
구조된 동물들 대부분은 화상을 입었거나 호흡기 이상을 보였으며, 도망갔던 개들이 다시 돌아와 무너진 집터를 지키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예방에서 응급까지, 진화하는 수의 봉사”
과거 수의 봉사 활동(동물의료봉사활동)이 주로 사설 유기동물보호소를 방문해 예방접종과 중성화수술 위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 활동은 산불 재난으로 인해 발생한 동물 응급 환자들을 대상으로 수의사들이 전문적인 치료를 진행했고, 대학 동물병원이나 24시간 관리가 가능한 동물병원으로 연계 이송하여 치료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형태의 수의 봉사였습니다.
무엇보다 전국에서 100여 명의 수의사들이 자발적으로 사회적 재난 대응에 참여해 생명존중의 가치를 실현한 이번 활동은 수의계의 전문성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보여준 뜻깊은 사례였습니다.
“동물도 재난의 피해자입니다. 함께 대피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재난 발생 시 사람과 동물이 함께 대피할 수 있는 체계 구축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입니다.
많은 반려인들이 동물을 두고 떠날 수 없어 대피를 망설이거나 거부합니다. 이는 결국 사람의 생명까지 위협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남겨진 동물들은 감염병의 원인이 되거나,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예기치 못한 위험 행동을 보일 수 있어, 공중보건 차원에서도 함께 대피하고 보호받을 수 있는 체계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는 단순한 동물보호를 넘어, 사람의 안전을 위한 중요한 조치입니다.
“재난 현장에서의 수의 진료 공간 확보와 예산 편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재 재난 대응 체계는 여전히 ‘사람이 우선’이라는 인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피해를 입은 동물들은 여전히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으며, 구조와 치료에 대한 간단한 매뉴얼조차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봉사자들이 동물 진료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응급 동물 환자의 ‘골든타임’은 놓쳐졌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수의사들과 동물단체 봉사자들은 자비로 현장에 도착했고, 각자가 가져온 약품과 장비로 봉사 활동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질병 응급 상황에 비해 약품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정부는 향후 재난 상황을 대비해 사용 가능한 공간이나 유휴 공공시설을 사전에 확보하고, 피해를 입은 동물들에게 원활한 진료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개방해야 합니다. 또한, 다양한 환자에게 대응할 수 있도록 약품과 장비 구입을 위한 예산 확보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동물이 안전한 사회는 사람이 더 안전한 사회입니다”
기후 위기로 인해 재난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닌 일상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생명 간의 연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동물이 구조되고 회복되는 시스템은 인간 사회의 회복력을 강화하는 길입니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구조되고, 함께 회복하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안전한 사회’의 출발점입니다.
산불 현장을 함께해 주신 수의사와 ‘루시의 친구들’ 회원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전합니다. 여러분의 헌신 덕분에 수많은 동물의 생명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