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 순서대로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먹는 학교 뉴스가 있었다. 일등은 제일 먼저 받아먹고 꼴등은 제일 나중에 받아먹는다는 것이다. 첫 번째로 배식을 받는 아이야 기분이 좋을지 모르겠지만 제일 나중에 배식을 받는 아이는 매 식사시간마다 ‘내가 꼴찌다’라고 전교생에게 광고하는 꼴이다.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에게 그 시간은 끔찍한 시간일 것이다. 그렇게 먹는 밥이 맛이 있을까? 일등부터 꼴등까지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면 일등을 하는 아이도 있겠지만 항상 누군가는 꼴등을 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 누군가는 항상 공개적인 망신을 당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지켜야할 윤리적 기준을 하나 만 꼽으라면 무엇이 있을까? 많은 성현들이나 철학자들은 첫 번째 윤리적 기준을 ‘네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네가 누군가로부터 폭력을 당하기 싫으면 폭력을 가하지 말고 또 네가 누군가로부터 욕을 먹기 싫다면 욕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배식을 제일 나중에 받는 아이는 심한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누구도 그러한 모욕감을 느끼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성적이 꼴찌라는 이유로 그러한 모욕감을 받도록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그런 사태가 교육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을 두고 해당 학교장은 경쟁사회에서 꼴찌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노력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경쟁 사회에서 이겨나가도록 스스로 분발시키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쟁으로 차별을 합리화하는 사회
우리 사회는 경쟁 사회라는 이유로 구성원 간에 경쟁을 시키고 그 결과에 따라서 차별을 한다. 이러한 차별은 다만 배식에 한정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차별을 마주 한다. 우리 사회만 하더라도 노동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뉘며 같은 일을 하고도 다른 대우를 받는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의 44.7%이다. 그리고 이들의 평균임금은 143만원이다. 한 달에 143만원으로는 온전한 생활을 할 수 없다. 겨우 생존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같은 일을 하고도 누구는 정규직 대우를 받고 누구는 비정규직 대우를 받는다. 이러한 차별이 어떻게 가능할까?
이러한 차별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차별을 받는 이들이 그 차별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그것이 무엇일까? 우리 사회에는 경쟁이라는 겉으로 보기에는 공평한 듯한 방식을 채택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쟁을 옹호하는 배경에는 모든 사람들은 남보다 더 많은 재화를 얻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고, 남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고, 또 남보다 더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기저에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다른 이들과 더불어서 사는 이타적인 삶 보다는 이기적인 욕망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기적인 욕망을 갖고 있는 인간, 이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예전 같으면 공동체를 생각하기 전에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인간은 공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공동체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이기심을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기심, ‘이기적유전자’ 덕에 음지에서 양지로 나오다
그렇게 자신의 이기심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떳떳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러한 배경으로 첫 손에 꼽을 수 있는 것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이다. 도킨스는 이 책을 통하여 인간은 유전자의 복제 욕구를 수행하는 이기적인 생존 기계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유전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기계인데 이 유전자는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이기에 당연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 전체에 걸쳐서 유전자의 이기성을 반복하여 이야기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뻐꾸기이다. 뻐꾸기는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탁란습성이 있다. 탁란한 알에서 부화하여 태어난 뻐꾸기 새끼는 같은 둥지에 있는 알들을 둥지 밖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양부모가 가져온 먹이를 독차지 하여 받아먹는다. 이렇게 뻐꾸기 새끼가 태어나자마자 행하는 행동은 누구로부터 학습된 것이 아니다. 어미 뻐꾸기는 새끼가 태어나기 전에 알을 다른 새의 둥지에 놓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어미 뻐꾸기가 새끼 뻐꾸기에게 태어나면 어떻게 하라고 가르친 적은 없다. 뻐꾸기 새끼가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뻐꾸기의 유전자에 그렇게 이기적인 행동을 하도록 프로그램밍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도킨스는 이야기한다.
도킨스는 생명이 벌이는 모든 현상을 수학의 복잡한 확률 공식을 가져다 설명하며, 이기적인 유전자가 자신을 퍼뜨리기 위한 수단이라고 이야기한다. 가령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우리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을 사랑이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도킨스는 부모의 이런 행동은 부모 유전자가 자신의 유전자를 받은 자식이 온전히 성장하도록 하기 위한 이기심의 표현뿐이라고 이야기한다. 또 이모나 고모가 피가 전혀 섞이지 않은 타인보다 조카에게 애정을 더 가지는 것은 조카에게 자신과 동일한 유전자가 일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간단히 이야기하면 부모나 이모 그리고 고모가 자식이나 조카를 돌보는 이유는 사랑이 아니라 유전자가 자신을 퍼뜨리기 위한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유전자는 자신의 유전자를 복제하고 퍼트리기 위하여 다양한 방법을 이용한다. 생명체란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틀 또는 기계에 불과하다. 유전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틀을 다양한 형태로 만든다. 그렇게 겉으로 들어나는 모습을 도킨스는 표현형이라고 명명한다.
여기에 소라가 있다. 소라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딱딱한 껍질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딱딱한 껍질은 유전자 정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그리고 또 여기에 날도래가 있다. 날도래는 주위의 작은 돌조각을 모아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갑옷처럼 두르고 있다. 소라의 껍데기나 날도래의 돌조각 껍데기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측면에서 동일하며 이러한 구조물을 만든 것은 물론 유전자들이다. 도킨스는 소라의 껍데기뿐만 아니라 날도래의 돌조각 껍데기 또한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며 이러한 구조물을 ‘확장된 표현형’이라고 명명하였다. 도킨스는 이러한 확장된 표현형이라는 개념을 단지 세포나 생명체에만 한정시킨 것이 아니라 생명체가 이룬 집단이나 사회, 국가로 확장시킨다. 이러한 사회나 국가 또한 유전자가 자신을 보호하고 퍼트리기 위한 또 다른 표현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서 사회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그 근원이 유전자에 있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와 같이 도킨스는 생명은 유전자의 생존기계이며 생명이 벌이는 모든 현상들을 이기적 유전자로 환원시킨다.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비판
이러한 도킨스의 주장은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다양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논란은 도킨스 또한 예측한 부분이다. 무리한 주장을 하는 것이기에 그 주장에 불러일으킬 후폭풍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그래서 도킨스 스스로도 책의 많은 부분에서 자신의 ‘이기적인’ 유전자라는 표현에 대하여 해명하느라고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해명을 할 수 없는 부분을 해명하려고 하니 그 노력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게 할 뿐이다.
도킨스의 주장 중 가장 많은 비판을 받는 부분은 생명체를 유전자로 환원한 부분이다. 도킨스는 생명체를 유전자에 의한 생존 기계일 뿐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생명체를 유전자로 환원할 수 있는가? 생명체는 수많은 유전자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유전자는 생명체가 아니다. 또 그 유전자가 생명체의 모든 것을 결정하지는 않는다.
1953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 DNA의 이중나선형 구조를 밝혀낸 후 유전자는 생명현상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유전자가 생명체의 모든 것을 이룬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러한 흐름 속에 실시된 것이 후쿠오카 신이치가 실시한 녹아웃 마우스와 같은 실험이다. 신이치는 췌장의 기능을 연구하면서 특정 조직의 기능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호르몬을 생산하는 유전자를 제거한 마우스를 만들었다. 특정 유전자를 제거한 마우스를 녹아웃 마우스라고 한다. 신이치는 췌장의 소화효소를 생산하는 유전자를 제거한 마우스는 소화효소 분비 장애로 인하여 영양 흡수에 문제가 생겨서 당뇨병에 걸려 영양상태가 나빠질 것이라고 예상을 하였다. 그런데 실험결과 녹아웃마우스는 아무런 문제없이 건강하게 자랐다. 그것은 소화효소를 생산하는 유전자를 제거했을 때 녹아웃마우스는 분화하는 과정 속에서 그 제거된 유전자가 해야 하는 역할을 주변의 다른 유전자들이 대신 함으로 인하여 소화효소가 정상적으로 분비되는 건강한 마우스가 된 것이다. 생물의 유전자는 각각이 기계적으로 특정 기능 만 하도록 설정된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에 따라서 적절한 기능을 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일관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을 신이치는 쇤하이머의 이야기를 빌어 동적 평형이라고 한다.
2001년 발표된 인간 게놈 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 HGP)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약 4만 개 정도의 유전자가 있다. 이 유전자들이 인간의 행동이나 특성을 결정하는가? 유전자는 RNA에 의해 복제되어 단백질을 만듦으로써 신체의 반응이나 변화를 일으킨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은 단지 유전자가 있다고 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여건이 형성되어 있어야 작동을 한다. 비유를 하자면 집안에 형광등이 있다고 항상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아니다. 주변이 어둡거나 또는 사람이 있을 때 스위치를 켜야지 형광등에 불이 켜진다. 유전자 또한 환경에 따라서 작동스위치가 켜질 때 작동을 한다. 또 이러한 작동은 녹아웃 마우스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단독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유전자와 환경과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가령 당뇨병 발병에 관여하는 유전자만 해도 1500여 개이고, 장 질환의 일종인 ‘크론병’에 관여하는 유전자는 70여 개가 있는데 이 유전자들에 문제가 없는 사람도 이 병에 걸린다.
도킨스는 유전자가 생명의 활동을 결정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유전자는 단지 정보만을 담고 있을 뿐이다. R.C 르윈틴은 “우리는 우리 유전자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결정되지는 않는다. 발생은 부모로부터 유전 받은 유전자에 의존할 뿐 아니라 특정한 온도, 습도, 영양분, 소리 등 환경에 의존한다.” 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경우 한 아이가 태어나서 어떠한 성인으로 자라는지는 그의 유전적 영향뿐만 아니라 그가 태어난 환경 또 어떤 교육적 분위기에서 자랐는지에 따라서 변화된다.
유전자는 이기적인가?
또 도킨스는 유전자의 작용에 대하여 이기성을 강조한다. 유전자는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이 부분은 도킨스가 유전자의 표현형이라고 이야기한 생명체가 이기적인 존재인가 이타적인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면 된다. 생명체는 이기적인 존재인가? 이타적인 존재인가? 이러한 논의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지겹도록 반복되어온 논의들이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를 묻는 성악설과 성선설 또한 그런 부류의 질문이다.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이러한 질문 자체가 인간의 이분법적인 시각일 뿐이다.
자연에 절대적인 선과 악이 존재하는가? 무엇을 선이라고 말하고 무엇을 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알에서 깨어난 바다거북이 부리나케 바다로 뛰어간다. 이 때 어디선가 나타난 갈매기 떼들이 바다거북이 새끼들을 쪼아 먹는다. 갈매기의 행동은 선한 행동인가 아니면 악한 행동인가? 갈매기의 행동은 선한 행동도 악한 행동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다만 그러한 행동을 판단하는 인간의 이분법적인 사고만이 존재할 뿐이다.
생명은 이기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이타적인 존재인가? 생명 각자는 자신을 보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먹이를 확보해야 하고 주거지를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에 이기적인 행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생명은 혼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장 많은 종들은 무리를 지어야만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그 공동체를 통하여 자신의 후손을 재생산할 수 있다. 그래서 개체는 공동체를 보호하고 헌신해야 하며 적어도 짝꿍은 돌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생명체는 이기적인 면이 있지만 또한 이타적인 면 또한 있다. 어느 한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별과 착취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들
생명에는 이기성과 이타성을 동시에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킨스는 이타성은 무시하고 이기성만을 강조하였다. 왜 그랬을까? 도킨스가 책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책의 제목을 『불멸의 유전자』라고 했다면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킨스는 유전자의 이기성 만을 강조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왜 그랬을까?
도킨스가 원하던 바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도킨스가 유전자의 이기성을 강조하면서 그의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인간 세상은 끝없는 차별과 착취가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차별과 착취는 다양한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종교와 계급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계급은 신에 의해서 결정되었거나 전생의 업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순종하고 살아야한다고 주장을 하였다. 그리고 이성이 강조되는 때가 되어서는 이성이 뛰어난 존재가 그러하지 못한 존재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러한 논의에서 이성을 지닌 인간이 이성이 없는 동물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는 논의가 퍼져나갔다. 임마뉴엘 칸트(Immanuel Kant)는 “동물은 자의식을 갖지 못하며, 따라서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목적이란 인간을 말한다.”라고 이야기 하였다. 또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생명을 정신과 물질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며 인간은 영혼이 있지만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동물은 움직일 수 있는 기계라며 ‘자동기계’라고 하였다. 도킨스가 생명을 ‘생존기계’라고 명명한 것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생명관을 계승한 측면도 있다고 할 것이다. 이성을 기준으로 한 이러한 시각은 동물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생물을 폭력적으로 대하도록 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이성을 기준으로 한 사고는 자연의 생물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 내에서도 정신적 인간과 육체적 인간으로 구분하며 지배계층이 자신들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다.
과학의 시대가 되어서 다윈의 주장은 더 진화된 생물과 덜 진화된 나뉜다는 진화론으로 왜곡되어져 많은 차별과 착취를 가져왔다. 다윈은 애초에 진보라는 뉘앙스를 풍길 수 있는 진화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변이를 수반한 유전’이라고 하였을 뿐이다. 하지만 당시 영국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자들에 의하여 다윈의 주장은 ‘진화론’이 되었으며 이러한 진화론은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폭력과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쓰여졌다. 그들은 생명은 진화에 의해 고등동물과 하등동물로 나뉘며 약육강식의 자연계에서 고등동물이 하등동물을 마음껏 다루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물론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고등한 동물이며 그 중에서도 최고의 고등동물은 유럽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유럽의 제국주의자들은 제3세계 원주민들을 짐승처럼 부려먹는 것을 당연시 하였다.
시간이 흘러 생명을 분자 수준에서 연구하는 시대가 되면서 탐욕스럽게 사회의 이윤을 독차지한 자들은 그들이 행하는 차별과 착취를 옹호할 이데올로기가 필요하였다. 그 이데올로기가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다. 도킨스에 따르면 유전자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탐욕스러운 자들의 이기심 또한 부끄러워할 것이 전혀 없어진다. 왜냐하면 유전자의 표현형인 생명은 근원인 유전자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이기적인 존재이다. 다만 그러한 이기성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능력을 키우거나 적어도 그러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비난하지 말고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다
자신의 주장을 하는 과학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그것은 지금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과 같다. 하지만 어떤 사건은 뉴스가 되고 어떤 사건은 아무런 언급도 되지 않으며 사라진다. 무엇이 이슈가 되고 뉴스가 되는가? 뉴스는 합리적이고 공평한가? 그렇지 않다. 뉴스는 뉴스를 만들어내는 이들의 이해관계에 의해서 취사선택되어진다. 지금 4대강의 강물이 썩어 들어가고 있고 불량부품을 사용한 원자로는 점차로 노화되어 잔 고장들이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소식들은 주요 언론의 관심대상이 되지 않으며 그들이 이슈화하고 싶은 것들만 뉴스 메인으로 다루어진다.
유전자나 생명에 대하여 이야기한 과학자들은 많다. 하지만 그 중에 누구는 리처드 도킨스 같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누구는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리처드 도킨스의 논란이 많은 『이기적 유전자』는 1976년 쓰여졌고 많은 논란 속에 이제는 용도폐기 되어졌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이기적 유전자』 는 청소년 권장 도서로 읽혀지고 있으며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지키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도킨스의 책을 읽으며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자포자기 하는 심정으로 받아들인다. 그에 비해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어떤 문제를 갖고 있는지 날카로우면서 그다지 읽기에 어렵지도 않은 R.C. 르윈틴의 『DNA 독트린』과 같은 책은 번역 1쇄를 끝으로 절판이 되었다. 어떤 책은 절판이 되고 어떤 책은 스테디셀러로 팔리고 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 책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책을 필요로 하는 세력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 『이기적 유전자』은 대중 과학서 인 것 같지만 과학서가 아니다. 세상에는 어느 곳에나 이기적인 자들이 있다. 그러한 자들이 세력을 점차 키워 이제는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전 세계를 하나의 권역으로 만들어 그들의 끝없는 탐욕을 채우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끝없는 경쟁을 강요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강요된 경쟁은 구멍가게 주인에게는 대형마트와 경쟁하라고 하고 시골의 농부들에게 까지 세계와 경쟁하라고 한다. 그러한 무한경쟁은 생명이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한 생존기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끝없는 탐욕을 합리화한다. 『이기적 유전자』는 그러한 이기적인 자들의 행동을 합리화해주는 이데올로기 서적이다. 실제로 『이기적 유전자』을 읽고 자란 사람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의 영향으로 생명은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을 하고 또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