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돈수의사의 처방제 키워드, 불편함·식품안전·매약의존·진료시스템
2020 수의양돈포럼, 수의사처방제 포함한 진료시스템 문제 조명
수의사처방제 전자처방전 의무화는 양돈 임상에서도 논란이다. 수의사가 직접 사용한 내역을 전산보고하도록 한 조치를 두고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반면 식품안전 측면에서 번거롭더라도 처방약 사용통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의사에게 실질적인 처방권한이 주어져도 항생제 오남용을 줄일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나온다.
수의사도 결국 약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는 구조적 문제가 심각한데다, 처방전 전문 수의사가 늘며 진료의 질이 떨어지고 강한 약에 의존하는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양돈수의사회(회장 김현섭)는 11일 충북 C&V 센터에서 개최한 2020 수의양돈포럼에서 수의사처방제와 양돈수의사 진료시스템 변화를 조명했다.
‘2, 3일치 내역 입력하려면 반나절은 걸려’..처방전 전문 수의사 활동 여전
‘식품이기 때문에 다르다’ 국민보건 위한 기록 필요성도
이날 포럼에서 만난 수의사들은 수의사처방제 전자처방전 의무화 개정이 지난 2월 시행됐지만 양돈 임상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대한수의사회가 수의사 처방대상약 사용내역 전산보고 의무화를 보이콧하고 있고, 동물용의약품도매상과 연계한 처방전 전문 수의사들의 진료 없는 불법 처방 문제도 여전하다는 것이다.
양돈 임상수의사 A씨는 “진료기록을 수의사처방관리시스템(EVET)에 입력하고 있는데 너무 불편하다”고 호소했다.
보통 농장 정기방문에 맞춰 한달 치 처방을 내리다 보니 약품 성분이 많으면 2, 30개에 달하기도 하는데, EVET 프로그램이 너무 불편해서 입력에 소요되는 행정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PC로 해도 불편한데 스마트폰을 활용한 현장입력은 꿈도 꾸지 않는다.
A수의사는 “2, 3일치 진료내역을 모아서 입력하려면 반나절은 족히 걸린다. 하다 못해 탭(TAB)키도 안 먹어서 마우스 클릭과 숫자 입력을 번갈아 하다 보면 속이 터진다”며 “처방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수의사가 있기나 할지 의문이다. 부담스러운 업무인데 돈은 안 되고..현장 반응이 달가울 리 없다”고 꼬집었다.
이날 패널토론에 나선 내포동물병원 이주용 원장도 처방전 발급 방법은 전자처방전으로 일원화하되, 수의사 사용내역의 전산보고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했다.
이주용 원장은 “사용내역 전산보고 의무화는 아직 시기상조다. 시스템이 굉장히 불편하고, 전산에 익숙하지 않은 개업수의사도 많다”면서 “문제가 의심되면 개별적으로 진료기록부를 조사할 수 있는 기존 체계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반면, 불편하더라도 수의사의 사용내역까지 전산화해 통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양돈 임상수의사 B씨는 “반려동물은 몰라도 가축에서는 처방대상약이 어떻게 사용되는지 정확히 통계가 잡혀야 한다. 식품의 안전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현재의 입력 시스템을 개선해야 할 필요는 있지만, 단순히 번거롭다고 기록을 거부할 명분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A수의사도 처방약 통계 확보 필요성에는 공감하면서 “통계 확보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수의사사용내역 전산보고는) 좀더 간편한 형태로 개편하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발표자로 참석한 우연철 대한수의사회 사무총장은 “(처방약·처방권한을 확대하려면) 국민과 공중보건을 위해 수의사들이 뭔가 의무를 더 하겠다고 주장해야 설득할 수 있다”며 “그렇게 해서라도 수의사에게 합당한 권한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의사는 처방대상약을 자체적으로 사용할 수도, 처방전을 발급할 수도 있는 만큼 두 권한을 모두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만 처방대상약의 확대, 제품명 처방으로의 전환, EVET 시스템의 사용성 개선 등이 제대로 선행되지 못한 채 EVET 사용이 의무화되며 현장의 불편함이 크게 다가온 점은 문제로 공감했다.
실질적 처방권한 생기면 항생제 사용량이 줄어들까
진료비 못 받는 대신 약품 판매하는 구조가 문제..진료시스템 확립돼야
수의사처방제의 출발은 항생제 내성 문제였다. 농장이 항생제를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하고, 수의사 직접진료 후 처방에 따라 쓰게 하면 사용량도 줄고 내성 문제도 개선될 것이란 기대다.
하지만 2013년 수의사처방제가 도입된 이후 축산 항생제 사용량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다.
이는 현재까지도 현장에서는 실질적인 ‘진료 후 처방’이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판매업소에 주문하면 처방전 전문 수의사가 GPS 기록을 만들면서 배달해주니, 배송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약품 사용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향후 수의사처방제가 개선돼 수의사에게 실질적인 처방권한이 주어지면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부호가 제기된다.
B수의사는 “동물병원조차 대부분의 매출이 약품판매와 연동된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아직까지 진료비를 따로 받지 못하는 대신 농장에 약품을 판매하는 것으로 갈음하는 관행이 지배적이고, 그러다 보니 수의사도 돈을 벌려면 약을 많이 쓰게 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주용 원장은 “농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수의사 처방 하에서) 오용은 확실히 컨트롤할 수 있다”면서도 “약품을 많이 판매하면 병원 수익이 많이 나는 구조이긴 하다. 유혹이 있다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때문에 농장의 자가진료를 줄이는 방향으로 양돈수의사 진료시스템이 확립되어야 처방제의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진단, 처방, 컨설팅 등에 대한 진료비 만으로도 동물병원이 운영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약품 판매에 의존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병성감정기관이 동물병원 수의사를 거치지 않은 가검물에 대해서도 정밀검사를 실시해주는 행태나 동물약품판매업소, 사료업체, 농·축협 직원들의 불법진료 등 농장이 자가진료를 할 수 있게 뒷받침하는 관행들을 문제로 지목됐다.
처방전 전문 수의사 형태로 업계에 들어온 수의사들이 더 비싸고 강한 약품에 의존하다 보니 항생제 내성이 더 심각해진다는 우려도 나온다.
우연철 사무총장은 “처방제 확대, EVET 의무화 이후 기존의 관행적인 불법진료를 단계적 철폐를 추진해야 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