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회, 가축전염병 병성감정 탈을 쓴 불법진료행위 중단 촉구
동물병원 없이 정밀진단 이뤄지는 환경서 진료권 설 자리 없다..현실적 보완책 병행 필요 지적도
대한수의사회 농장동물진료권쟁취특별위원회(이하 특위, 위원장 최종영)가 가축전염병 병성감정의 탈을 쓴 농장동물 불법 진료행위의 중단을 촉구했다. 병성감정과 일반적인 질병진단(진료행위) 사이의 교통정리에 나섰다.
동물병원 없이도 병성감정기관과 농가, 사료·약품업계 등이 가검물 채취부터 정밀검사, 그 결과에 따른 약품 선택까지 진행하는 환경 속에서 동물병원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진료행위에 해당하는 일반적인 질병진단’과 ‘가축전염병 병성감정’을 구분하고, 병성감정이라면 의심신고 등 가축전염병예방법상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요구다.
반면 업계의 진단비용 지원에 의존했던 가축질병 정밀진단 시장이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돼지생식기호흡기증후군(PRRS) 등 당국이 실질적인 관리는 하지 않으면서도 이동제한 등 규제만 남아 있어 농가들이 불법 진단을 찾게 만드는 3종 가축전염병 관리체계를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위는 동물병원이 아닌 축산관련업체 수의사와 병성감정기관의 불법진료행위 중단을 촉구하고 5월부터 가축전염병예방법 위반 정황에 적극 대응할 방침이다.
가축전염병 병성감정 체계 속에서 실제로는 정밀진단..불법진료행위 지적
단순 약품 사용보다 진화한 자가진료·불법진료
현행 가축전염병예방법(가전법)은 병명이 분명하지 않은 질병으로 죽거나, 전염병에 걸렸다고 믿을만한 검사결과나 증상을 보인 가축은 반드시 방역당국에 신고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해당 폐사체나 아픈 가축(의사환축)이 실제로 전염병에 걸린 것인지, 걸렸다면 어떤 병인지는 현장 관찰만으로 알아낼 수 없다. 따라서 유전자검사 등 실험실적인 정밀검사가 필요하다. 가전법 상의 표현을 빌리자면 ‘병성감정’이다.
의사환축을 발견한 신고자나 그 신고를 받은 지자체는 동물위생시험소나 검역본부에 병성감정을 의뢰할 수 있다. 민간병성감정기관으로 지정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도 병성감정을 실시할 수 있다. 신고를 했으니 어떤 질병인지 확인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문제는 일선에서 ‘병성감정’과 ‘일반적인 질병진단’이 섞여 있다는 점이다. 민간병성감정기관은 대부분 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이 특위의 주장이다.
농가에 진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불법 진료행위가 ‘병성감정’의 탈을 쓰고 자행된다는 것이다.
특위가 제시한 대표적인 유형은 이렇다.
약품업체 A는 민간병성감정기관 B와 계약을 맺고 ‘병성감정’을 의뢰한다(약품업체 스스로 병성감정기관을 보유하는 경우도 있다). A업체의 고객인 C농장에서 질병문제가 의심되면, A업체의 직원인 D수의사가 현장을 방문하고 가검물을 채취해 B기관에 검사를 의뢰한다.
C농장은 별도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수수료는 A업체가 지불한다. C농장이 A업체의 약을 구입해주는 대가로 제공되는 서비스 성격이 짙다.
실제로 C농장에 가축전염병 발생이 의심되는 상황이라면 문제가 없다. 현행 가축전염병예방법은 누구든 의심신고를 접수하고 신고자가 병성감정을 의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특위의 지적은 A도 B도 C도 D도 가축전염병 신고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무늬만 병성감정일 뿐 일상적인 질병진단이라는 것이다.
일상적인 질병진단은 엄연한 동물진료행위라는 것이 수의사회와 특위의 입장이다. 병성감정이 아닌 진료행위라면 동물병원이 아닌 A업체 소속의 D수의사가 벌인 행위는 불법진료가 된다.
아울러 정밀진단을 실시한 B기관도 동물병원이어야 한다. 사람에서도 검체검사수탁기관은 모두 의료기관이다. 하지만 특위에 따르면, 국내 병성감정기관 대부분은 동물병원이 아니다. 수의과대학의 병성감정기관조차 동물병원과 별개로 운영되고 있다.
최종영 위원장은 “현장에서 병성감정기관에 의뢰해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순간 가전법 상 신고의무도 발생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신고없이) 그냥 의뢰하고, 원하는 항목 검사하고, 비용은 사료·약품업체가 냈다”고 꼬집었다.
이러한 행태 속에서 농장의 자가진료·불법진료는 더욱 심화됐다. 단순히 ‘동물병원 수의사의 처방없이 농가가 약을 선택해 쓰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각종 정밀검사를 의뢰하고 그 결과에 따라 어떤 의약품을 어떻게 쓸지 판단하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동물병원 그 자체를 대체하는 모습이다.
최종영 위원장은 “병성감정기관이 일반 동물병원의 역할을 해왔던 셈”이라며 병성감정의뢰라면 가축전염병 의심신고를 포함해 관련 절차를 준수하고 일반적인 질병진단 검사와 분리할 것을 촉구했다.
정밀진단시장 위축·퇴보 우려도
‘불법 찾지 않아도 되도록 제도적 지원·개편 병행해야’
한편으로는 현실론도 제기된다. 국내 농장은 고가의 정밀검사비용을 직접 부담하려는 인식이 아직 부족한데, 업계 지원마저 없으면 아예 검사없이 마구잡이로 약을 사용하는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김원일 전북대 교수는 “동물병원이 자리잡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가야 한다는데 동의하지 않을 수의사는 없다. 업체가 직접 검체 채취해서 진단을 내리는 불법행위는 근절되어야 한다”면서도 “농장이 검사비를 내려는 인식이 극히 부족한 상황에서 (업계의 검사비 지원이 사라지면) 정밀진단시장 자체가 무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수의사회와 특위가 업계를 상대로 병성감정 관련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4월 중순부터 정밀진단의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김원일 교수는 “한 농장을 제대로 검사하려면 수백만원이 들어가기도 한다”면서 “동물병원이 실제로 진료를 담당하더라도, 농장에게 검사비용을 청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나 반려동물과는 다르다. 지금도 처방료나 왕진비조차 제대로 받기 어렵지 않나”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농가가 아예 정밀검사 자체를 외면하거나, 졸속으로 운영되는 저가 검사서비스가 만연하게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덧붙였다.
3종 법정전염병 관리체계나 농가별 책임수의사 제도 등 보완책 병행 필요성도 제기했다.
PRRS와 같이 이미 국내에 만연한 3종 가축전염병의 경우, 이동제한 가능성을 우려한 농가가 검사기관에게 불법행위(법정 가축전염병 미신고)를 종용하게 만드는 현행 법령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농장이 불법적인 업계 지원 대신 동물병원 수의사를 통한 진단·처방을 선호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책이 필요하다는 점도 지목했다.
김원일 교수는 “큰 규모의 농장부터 단계적으로 책임수의사를 통한 관리를 의무화하고 이를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며 “정부가 준비 중인 질병관리등급제도 농장을 잘 아는 수의사가 방역 전략을 구축하고 지도하는 형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인 토대 위에서 수의사가 진단·처방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진료권 쟁취활동과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의사회, ‘병성감정이라면 가전법 지켜라’..일반 진단행위와 분리 촉구
업계 변화 이어질까
대한수의사회와 특위는 4월부터 본격적으로 사료·약품업체와 병성감정기관의 업무 형태 개선을 촉구했다.
병성감정의뢰일 경우 방역당국 의심신고 등 가축전염병예방법 상의 절차를 준수하고, 일반적인 검사의뢰와 병성감정을 분리하라는 취지다.
일상적인 진단검사는 진료행위에 속하는 만큼, 단순히 병성감정기관이나 연구실에 그치지 않고 ‘동물병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점도 함께 지목했다.
우연철 대한수의사회 사무총장은 “동물의 진료는 동물병원 수의사가 담당해야 한다”며 누구든 가축전염병 의심신고를 접수하고 병성감정을 의뢰할 수 있지만, 가전법 상 절차도 제대로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수의사회는 당국에 병성감정기관과 연계된 불법진료행위에 대한 조치를 촉구하는 한편, 국가기관도 일상적인 질병진단업무를 수행한다면 동물병원을 개설하는 등 수의사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을 지목했다.
책임수의사 제도화에 대해서도 병성감정·일반진단행위의 교통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농가가 무료로 정밀진단 서비스를 받고 약을 선택해 주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수의사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의무화’라는 규제에 찬성할 것이라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수의사회와 특위는 5월부터 불법진료 정황이 의심되는 병성감정기관에 대해 감독기관에 대한 정보공개청구 등을 통해 가전법 준수 여부를 모니터링할 계획이다.
동물약품업계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병성감정기관과 맺었던 일괄 검사의뢰 계약을 매듭짓거나, 농장을 방문하던 수의사 직원들의 업무를 재검토하는 모습이다.
한 약품업계 수의사는 “(약품업체 직원인) 수의사가 농장을 가지 못한다면 일반 직원과 다를 바가 없어지는 것 같다”며 고민을 토로했다.
또다른 업계 수의사는 “아무리 영업상 필요하다고 해도, 회사가 직원의 위법행위까지 보호해주지 못한다. 불법 행태는 바뀌어야 한다”면서 “(업체 수의사가) 농장에 가지 않더라도 해외처럼 동물병원이나 대리점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업무에 집중하는 등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