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수의인물사전 59. 이방환(李芳煥, 1923~2001). 4년제 수의학 교육 첫 졸업생, 전북대 학생과장, 학장, 대학원장. 수의진단학·수의내과학 공동 집필, 대한수의학회장, 한국우병학회 초대 회장, 전라북도 문화상, 국민훈장 모란상.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1923년 11월 28일 전라남도 무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6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안좌공립보통학교를 졸업(1937. 3.)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중등학교 과정인 나라[奈良] 현립 요시노[吉野]농림학교를 졸업(1944. 3.)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작은 섬 출신이었지만 유학생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도 체력을 연마하여 5학년 때는 유도 2단 전교 최강자로 전국 대회에 주장으로 출전하기도 하였다.
성적도 우수하였는데, 특히 이과 과목에서 뛰어났기에 유도를 좋아한 교무과장 겸 수학 교사인 사사키의 권유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다.
전쟁 말기인 점을 고려하여, 재학 중 징집이 유예되는 의학과 수의학 중 수의학을 택하여, 도쿄수의축산전문학교(니혼대학 농수의학부의 전신)에 응시하였는데, 경쟁률이 40대 1이었다(한국인 응시자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 1학기를 마치고 2학기 시작 무렵 오쿠라학장의 호출을 받아 학장실에 가니 “군은 유일한 조선 출신의 학생인데 먼 곳에서 유학 와서 최고의 성적을 올렸으니 (중략) 신원 보증을 내가 해주겠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와 이야기하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2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인 6월(1945) “전세가 어려우니 빨리 조선으로 돌아가 수원농림전문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홋카이도 제국대학에서 공부하고 싶으면 연락하라.”는 오쿠라 학장의 말을 듣고 도망치듯 서둘러 귀국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수원농림전문학교 수의축산학과에 편입하여(교명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전문부로 변경됨) 1947년 6월에 졸업하고(전문부 졸업하면서 제370호 수의사 면허 취득, 1947. 8. 1.) 같은해 9월 개교한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수의학부 3학년에 김교헌, 이장락, 조춘근과 함께 편입하여 4년제 수의학 교육 과정의 첫 졸업생이 되었다.
어느 분야든 마찬가지였지만 교수 부족이 심했던 미 군정 시절에 다른 동료들과 수의장교 벤저민 블러드(Benjamin Donald Blood)를 도와 연건동 경의전 교사를 동물병원으로 리모델링하고 직접 진료에 참여하여 말 위주의 일본식 수의 임상 교육을 농장(산업)동물과 반려동물 중심의 미국식 수의 임상 교육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일조하였다.
졸업(1949. 8.) 후 대학에 조교로 임용되었는데, 건국 후 처음 실시된 제1회 외국유학시험에 합격(1950. 5.)하여 학교를 사임하였으나 한국전쟁 발발로 출국을 포기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이리농림학교 구내에 설립한 도립이리농과대학(농학과밖에 없는 단과대학에 1, 2, 3학년 재학생 약 140명)에 수의학과를 설립(1951. 8.)하는 데 앞장섰다(당시 수의학과는 서울대학교에만 있었다). 인재난이 극심한 시기에 부산에 체류 중인 대학 은사 김용필 교수를 수소문하여 전북대학교가 국립으로 출범(1952. 4. 1.)할 때 초빙한 것은 전북대학교 수의학과의 초기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대학 강의에서나 임상 수의사를 위한 강의에서나 그는 해박한 지식을 활용하며 명쾌한 강의를 해 감동을 주었다.
농과대학에서 약 20년간 근무하면서 학생과장(1957~1958), 농과대학 학장(1963~1965), 전북대학교 대학원 원장(1969~1970)의 보직을 겸하기도 하였다. 이후 서울시립농업대학 수의학과(1971. 1. 20.~1977. 4. 18.)에 봉직하게 되었는데 1973년부터 불어 닥친 수의학과 통폐합 때문에 전남대학교 수의과대학으로 전근(1977. 4. 19.)하여 정년(1990. 2. 28.)에 교단을 떠났다.
전남대학교 수의과대학으로 옮긴 것은 고향에서 가까웠기 때문이라기보다 당시 6년제가 무산되고 나서 서울대(수의과대학), 경북대와 전남대(수의학과), 이 세 곳에만 수의학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대학에서나 성품이 호방하고 두주불사(斗酒不辭)했기에 동료나 후배 교수는 물론이고 제자들과도 잘 소통했다. 정년퇴임 때 남긴 회고록 『흑판을 등지고 돌아본 수의축산 반세기』(1990)에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수의진단학』을 비롯한 여러 권의 저서가 있으나 자신이 주도하여 다른 대학 내과 교수들과 손잡고 1960년대에 발행한 『수의내과학』은 모든 수의과대학 학생들의 교재로 사용되어 왔다.
대한수의학회장(1971. 10.~1973. 10.)과 1996년 설립된 한국우병학회 초대 회장, 대한수의사회 학술홍보위원장(1975. 12.~1980. 12.)을 역임했다. 전라북도 문화상(1964. 12.)과 교육 및 학술 분야의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2등급 국민훈장, 1990. 2.)을 받았다.
전북대학교 수의과대학의 발전에 기여하고 우리나라 수의 임상교육의 기초를 구축한 그의 선구적 발자취를 기리기 위하여, 졸업생들이 성금을 모아 전북대학교 동물병원에 그의 흉상을 건립하기로 했는데, 그 염원이 2008년 7월 10일 제막식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지금은 캠퍼스가 익산으로 이전하여 익산캠퍼스 수의과대학 동물병원에서 내방객과 마주하고 있다. 글쓴이_백영기, 양일석
*이 글은 한국 수의학 100여년 역사 속에서 수의학 발전에 기여를 한 인물들의 업적을 총망라한 ‘한국수의인물사전’에 담긴 내용입니다. 대한수의사회와 한국수의사학연구회(회장 신광순)가 2017년 12월 펴낸 ‘한국수의인물사전’은 국내 인사 100여명과 외국 인사 8명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요, 데일리벳에서 양일석 전 서울대 수의대 교수를 비롯한 편찬위원들의 허락을 받고, 한국수의인물사전의 인물들을 한 명 씩 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