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수의대에서 수의인문사회학은 아직 생소하다
수의인문사회 교육, 수의법규 암기·진로 탐색 위주 그쳐..통합 교과 만들어야
수의사의 역할은 사람과 동물 사이에 있다. 전문직업인으로의 정체성과 윤리적인 의사결정 능력도 요구된다. 동물병원 직원은 물론 주변 전문가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하는 능력도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수의사의 홀로서기에 달려 있다. 기초·예방·임상의 삼분법에 갇힌 수의과대학에서 수의인문사회학적 역량은 외면받고 있다. 국내 전임교원도 단 한 명에 불과하다.
고려대 연구윤리센터 정예찬 박사(사진)는 지난달 26일 서울대에서 열린 한국수의인문사회학회 창립 워크숍에서 국내 수의과대학의 수의인문사회학 교과개설 및 교육현황을 소개했다.
수의법규, 수의학개론, 윤리 관련 과목 개설은 됐지만..
한국수의과대학협회와 수의교육학회가 2019년 제시한 수의학교육 학습성과는 수의과대학 졸업생이 갖춰야 할 역량을 크게 진료 역량과 기본 역량, 전문직업성 역량으로 구분했다.
전문직업성 역량은 기본·진료에 비해 개수는 적었지만 수의사의 사회적 역할, 전문직으로서의 정체성, 윤리적 의사결정, 동물복지 증진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관계, 동물건강 관련 문제를 인문학·사회과학적 측면에서 다루는 ‘수의인문사회학’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 국내 수의과대학에서 수의인문사회학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통적인 기초-예방-임상의 삼분법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예찬 박사는 국내 10개 수의대 홈페이지에 공개된 2020, 2021년도 개설과목과 5개 대학의 강의계획서를 토대로 수의인문사회학 교육 현황을 조사했다. 수의인문사회학 교과목뿐만 아니라 진로탐색, 커뮤니케이션 등 전문직업성 관련 과목도 포함했다.
그 결과 대학마다 차이가 있지만 수의법규, 수의윤리학, 동물복지, 수의역사학, 수의학개론 등이 개설된 것으로 조사됐다.
수의사 국가시험 출제과목인 수의법규는 10개 대학 모두가 개설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사회학적 고찰보단 국시 준비를 위한 단순 암기 위주로 운영된다는 지적이다.
정예찬 박사는 “의대에서도 의료법 교육에 대한 고민이 있다. 현장에서의 법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치고, 법적 옳음과 윤리적 옳음을 구분하는 의료윤리 교육과 연계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지목했다.
수의학개론은 9개 대학에서 개설됐다. 수의사 활동 분야나 다양한 주제를 다룬 특강 형식이다 보니 강의 내용이 유동적일 수밖에 없는 한계가 지적됐다.
수의윤리학(4), 동물복지와 윤리(2), 생명윤리와 법(1) 등 윤리 관련 과목도 다수 개설됐다. 이 밖에도 동물복지학이나 동물병원 경영학, 진로 교과의 개설 사례도 확인됐다.
대학·외부강사마다 교육내용 천차만별..통합교과 만들어 예·본과 걸쳐 배치해야
정예찬 박사는 “수의인문사회학 교과에 8~12학점이 할애되고 있지만 타 교과에 비해 선택과목인 경우가 많다”며 “전임교원을 확보해 수의인문사회학 교육 과정을 운영하는 곳은 서울대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대학마다 교과, 교육자, 교육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세계동물보건기구(OIE)는 동물복지와 축산경제, 수의정책, 수의사 법규, 수의윤리, 커뮤니케이션 등을 수의학교육 핵심 커리큘럼에 포함시켰다.
특히 의료기록 작성이나 고객 소통, 비판적 읽기와 사고 등 커뮤니케이션 스킬은 수의학 교과과정 전반에 걸쳐 다루도록 권고했다.
미국의 수의과대학도 커뮤니케이션 수업을 1~4학년 모두 지속하거나, 모듈형으로 구성된 수의인문사회 교과를 학사과정 전반에 나누어 배치하는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서울대 수의대는 전임교원을 중심으로 내용적으로 연계된 수의인문사회학 교과목 3개를 예과와 본과에 나누어 배치하고 있다. 예과의 ‘수의학의 이해’, ‘예비 수의사를 위한 자기 개발’과 본과의 ‘동물-수의사-사회’ 과목이다.
정예찬 박사는 “수의법규를 제외하면 (수의인문사회학 관련 교과가) 예과에만 치중된 경향을 보인다”며 “수의인문사회학 교육 목표와 내용을 정립한 통합 교과 커리큘럼을 만들어, 대학 간의 통일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