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 국가시험 문제 공개, 행정소송까지 불사한다
정보공개청구·행정심판 연이어 불발..수대협·수미연 ‘내년 초 행정소송..공감대 강화’
수의사 국가시험 문제를 공개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대한수의과대학학생협회(수대협)와 수의미래연구소(수미연)가 중심이다.
국시 문제에 대한 정보공개청구가 거부되고 관련 행정심판청구도 각하되면서, 내년초 행정소송까지 불사한다는 방침이다.
수대협과 수미연은 7월 8일 서울 일원에서 만나 수의사 국가시험 개편 프로젝트 추진을 합의했다. 국시 문제 및 정답 공개를 촉구하는 행정소송을 준비하기 위해 모금활동에도 나선다.
의사·치과의사 국시는 공개, 수의사 국시는 비공개
문항공개 민원·행정심판 청구했지만 좌절
내년초 국시 직후 행정소송 불사
현행 수의사 국가시험은 문제를 공개하지 않는다. 본과 4학년 응시생들은 음성적으로 복원된 기출문제(족보)를 온·오프라인으로 공유하며 시험에 대비한다.
반면 의사 국가시험은 2012년부터, 치과의사 국가시험은 2019년부터 필기시험 문제를 공개하고 있다. 출제 문항의 25~30배의 문항을 미리 확보한 문제은행을 운영한다는 점도 다른 점이다.
수대협과 수미연은 수의사 국가시험 개편 프로젝트의 주요 과제로 ‘실기시험 도입’과 함께 ‘국가시험 문제 공개’를 제시했다.
앞서 수미연은 지난해 8월 국시 문제와 정답을 공개해달라는 민원을 제기했지만, 검역본부는 이를 거부했다.
같은 해 12월 열린 제73차 수의사국가시험위원회에서 ‘수의사국가시험 문항 및 정답공개’ 안건을 심의했지만, 참석위원의 91%가 반대하면서다. 문제공개 이전에 충분한 논의와 사전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올해 행정심판까지 청구했다. 수미연 조영광 공동대표가 자신이 치렀던 2020년 수의사 국가시험의 문제·정답을 공개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7월 각하 처분을 받았다. 조 대표가 시험을 치렀을 당시 이의제기 기간(2020년 1월 21일 ~ 27일) 동안에는 정보공개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정심판의 청구 요건 자체를 갖추지 못했다는 취지다.
정보공개청구와 행정심판이 모두 좌절됐지만, 행정소송까지 불사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내년초 수의사 국가시험이 시행된 직후 문제공개를 청구하고, 이를 또다시 거부하면 수의대생을 대표하는 수대협이 행정소송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치과의사 국시 문제 공개 행정소송, 2005년 제기됐지만 불발
당시 대법 ‘출제 어려워지고 다빈도 출제영역 위주로 대비할 것’ 우려
‘다빈도 출제영역 제시되는 것 자체가 문제 아니다’ 반박도
국가시험 문제·정답을 공개하라는 행정소송이 벌어진다 해도 처음은 아니다. 치과의사 국가시험 문제 공개를 둘러싼 행정소송은 이미 2005년에 제기된 바 있다.
2005년 1월 시행된 치과의사 국시에서 불합격한 A씨가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을 상대로 문제·정답 공개를 청구했지만 거부당했고, 이에 불복한 A씨가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정보공개법)’이 쟁점이 됐다. 정보공개법은 공공기관이 보유·관리하는 정보는 공개 대상임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시험’ 등 공개될 경우 업무의 공정한 수행이나 연구·개발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는 정보는 비공개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제9조).
2년여의 법정다툼 끝에 승리한 쪽은 국시원이었다. 대법원은 치과의사 국가시험 문제가 비공개 대상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대법원은 문제를 공개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을 거론했다.
기출문제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문제를 활용하기 어려워지면 출제가 힘들어지고, (겹치게 출제하지 않으려면) 출제 가능한 문제의 범위가 점차 좁아지면서 문제은행 운영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가 공개되면 출제빈도가 높은 문제 위주로 수험을 준비하게 되면서, 시험을 통해 수험생의 실력을 정확히 측정하는데 상당한 지장을 받게 될 것이란 우려도 내놨다.
하지만 결국 현재는 의사도 치과의사도 국가시험 필기문제를 공개하고 있다. 한의사, 간호사, 간호조무사, 약사, 한약사, 임상병리사, 물리치료사, 치과위생사, 안경사 등 대부분의 보건의료인 국가시험이 이미 문제를 공개하고 있다.
당시 대법원의 우려가 국가시험 문제 공개를 절대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장벽은 아니었던 셈이다.
2011년 보건복지부는 2012년부터 의사 국가시험 기출문제 공개를 결정하면서 “그동안 기출문제가 응시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복원되어 출판되는 등 사실상 공개됐다”고 밝혔다. 기출 공개로 문제 유출 논란은 줄고 시험의 객관성·공정성을 높일 수 있다고 기대했다.
애초에 출제빈도가 높은 부분을 우선 공부하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온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반드시 갖춰야 할 핵심역량을 먼저 명확히 제시하고, 이를 국가시험으로 평가하는 방식은 권장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국가시험 개편 2차연구를 이끌고 있는 남상섭 수의교육학회장은 “수의사든 의사든 국가시험은 서열을 매기는 상대평가가 아니다.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을 아는지 확인하는 절대평가”라며 “(수의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부분이라면, 이미 알려진 출제 영역에서라도 출제해야 한다. 비슷한 문제라도 개별 응시생의 역량을 가늠하는데는 문제가 없다”고 지적했다.
수의학교육을 개선하려면 국시가 바뀌어야
국시가 바뀌려면 문제를 공개해야
수대협, 행정소송·모금으로 공감대 형성
2019년 수의교육학회가 수행한 ‘수의사 국가시험 현황 분석 및 개편 필요성 조사’ 1차연구에서 ‘국가시험 문제공개’는 개편 로드맵 가장 마지막 부분에 자리했다.
국가시험 문제공개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못을 박으면서도, 국가시험 운영기관 이관부터 시험 출제 방식 변경·문제은행 도입·평가목표집 개정 등 각종 개편작업을 바탕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공개 자체가 달성해야 할 대명제라기보다는, 문제를 공개해도 괜찮을 정도로 국시를 개선해야 한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바꿔 말하면 ‘(0000년에) 문제를 공개한다’는 방침 자체가 국가시험 개편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 수의학 교육을 내실화하기 위한 동력으로서 국가시험을 개편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진환 수대협 회장은 “수의대생은 국시 개편의 주된 영향권에 있다. 개편을 위한 목소리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수의사국가시험위원회가 지난해 문항 공개에 반대했다는 점을 지목하면서, 학생이나 외부에서 문항 공개를 촉구하는 움직임이 없는 한 자체적인 공개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수미연은 8일 크브레 월간 국시 모음집 프로젝트의 수익금 전액(1,157,541원)을 행정소송 준비를 위한 시드 머니로 수대협에 전달했다.
수대협은 수미연 기부금에 더해 행정소송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함께 진행할 예정이다.
조영광 대표는 “행정소송 입장을 먼저 밝힌 것도 ‘국시 문제를 공개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가기 위함”이라며 “모금을 추진하는 것도 공감대 형성의 일환”이라고 전했다.
김세홍 수미연 정책이사도 “학생을 비롯한 젊은 세대가 미래를 위해 직접 행동한다는 것이 국시 개편 프로젝트의 의의”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