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 국가시험 문항공개 행정소송 1심 패소..학생단체 ‘항소하겠다’

법원, 문제 출제 어려워질 수 있단 우려에 무게..‘수의학교육 후진적 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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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 국가시험 문항을 공개해달라며 대한수의과대학학생협회(수대협)가 농림축산검역본부를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 1심에서 패소했다.

서울행정법원은 국가시험 문항에 대한 정보공개를 거부한 검역본부를 상대로 제기된 정보비공개결정처분 취소 청구를 11일 기각했다.

문제가 공개되면 중복출제를 피하기 위해 실질적인 시험범위가 줄어들 수 있다거나, 기존에 검증된 기출문제를 재활용할 수 없게 된다는 식의 이유를 들면서다.

이에 대해 수의미래연구소(수미연)와 수대협은 “대한민국 수의학교육의 후진적 퇴보”라며 검역본부 측 주장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재판부에 유감을 표했다. 수대협 측은 20일 대책회의를 열고 항소하기로 결정했다.

수의사 국가시험 문항은 현재 공개되지 않는다. 시험문제도 매년 벼락치기로 만드는 방식을 유지하고 있다.

매년 출제위원으로 위촉된 수의대 교수진 40여명은 시험 응시일 직전 3박4일 동안 합숙하며 그해 시험에 나올 문제를 만든다.

국가시험은 350문항의 5지선다 객관식(기초100, 예방100, 임상130, 수의법규·축산학20)으로 진행되는데, 출제위원들이 약 3배수의 문제를 만들면 이중 350개를 채택하는 방식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문항을 공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2022년 대한수의과대학학생협회(수대협)와 수의미래연구소가 전국 수의대생 28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90%가 국가시험 기출문제 공개나 문제은행 도입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수학능력시험이나 각종 고시 등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는데 기출문제가 없는 쪽이 오히려 이상하다. 공식적으로 공개하진 않지만 이미 수의대생들도 음성적으로 복원한 기출문제를 중심으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이에 수대협은 2023년초 치러진 제67회 수의사 국가시험의 문항 및 정답을 공개해달라고 검역본부에 정보공개청구를 신청했다. 검역본부가 이를 거부하자, 수의사 출신 이형찬 변호사(법무법인 대화)의 도움을 받아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국가시험 문항을 공개하지 않으면 출제오류를 검증할 수 없고 시험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저해할 우려가 큰 반면, 시험업무의 공정한 수행이나 문제 출제에 큰 지장이 초래될 염려가 크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다.

하지만 재판부는 전자보다 후자에 더 무게를 실었다. 문항을 공개하지 않으면 출제오류의 시정 가능성이나 국가시험 행정의 투명성 확보 등이 다소 떨어지는 측면은 있지만, 문항 공개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시정되지 않은 채 섣불리 공개하면 시험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기출문제가 수년간 거듭 공개될 경우 중복 출제를 피하기 위해 출제범위가 좁아지고, 지엽적인 부분에서 출제가 이뤄질 개연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검역본부가 수의사 관련 단체의 의견과 수의사국가시험위원회 심의를 거쳐 장단을 비교한 후 비공개하는 입장을 취했다고 해서 이를 위법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점도 지목했다.

검역본부는 수대협 측의 정보공개청구를 거부하기 앞서 한국수의과대학협회, 한국임상수의학교수협의회, 대한수의학회, 한국임상수의학회에 문항 공개에 대한 의견을 조회한 결과 4개 단체 모두 비공개 의견을 냈다. 문제은행 도입 등 국가시험 시행방법을 개선한 이후에 점진적으로 공개하자는 것이다. 수의사국가시험위원회 심의에서도 참석위원의 79%가 공개에 반대했다.

문항 공개로 인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연구·개발로 많은 문항을 입고하는 문제은행이 필요한데, 10개 수의과대학에 새 출제방식을 도입하기 위한 시간·비용 제약이 상당한 상황에서 양질의 문제로 검증된 기출문제의 재활용을 포기해야 할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점도 우려했다.

   

이에 대해 수미연과 수대협은 “재판부가 출제오류 시정의 어려움이나 행정의 불투명성 등 비공개로 인한 문제를 분명히 인정하면서도 검역본부측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보수적 판결문을 낸 데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깜깜이로 운영되며 공중방역수의사 몇 명이 난이도를 검토하는 것이 검토과정의 전부일 정도로 잘못된 출제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소송을 제기한 것인데, 언제까지 그 후진적 출제시스템을 탓하며 공개를 미룰 것인지 답답하다”고 한탄했다.

재판과정에서 원고 측은 재판부가 인용한 검역본부 측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기도 했다.

문제가 공개되면 중복 출제를 피하기 위해 출제범위가 좁아진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매회차마다 주요한 내용에서 상당 부분 출제되는 것이 오히려 수의사로서의 기본 역량을 평가하는 수의사 국가시험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지적했다.

어차피 상대평가로 줄을 세우는 변별력이 필요한 시험이 아닌데다, 수의사 업무를 수행하는데 필수적인 지식이라면 오히려 해당 내용을 반복적으로 출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내용에 대해서도 질문지나 선택지를 변형하면 얼마든지 출제가 가능한만큼 시험문제 출제범위가 실제로 좁아지거나 평가도구의 기능을 상실할 것이라 보기도 어렵다.

아울러 문항 공개에 일부 비용이 수반된다 하더라도 이는 정상적인 시험 운영을 위해 어차피 지출해야 하는 비용에 불과하다는 점도 꼬집었다.

이미 의사, 치과의사 등의 국가시험 문제는 공개되어 있다. 특히 치과의사 국가시험은 문항 공개를 요구한 행정소송이 패소했음에도 추후 문항공개로 정책이 변경됐다.

수대협과 수미연은 “이번 소송은 단순히 문항의 공개 여부를 떠나 수의학교육과 대한민국 동물의료의 후진적 퇴보를 막기 위한 것”이라며 “검역본부와 국가시험위원회는 판결 뒤에 숨어 안주하지 말아야 할 것이며, 우리는 수의계의 미래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밝혔다.

수의사 국가시험 문항공개 행정소송 1심 패소..학생단체 ‘항소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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