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응적 완벽주의’ 스스로에게 가혹한 기대치에 괴로워하는 수의대생들

서울대 수의대서 5년간 학생들 만난 정진원 상담사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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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서울대 수의대에서 열린 2024 전국 수의과대학 신임교수 워크숍에서는 조금 특별한 강연이 진행됐다. 서울대 수의대에서 5년여간 수의대 학생들을 상담한 정진원 상담사의 특강이다.

이날 수의대 학생이 처한 다양한 스트레스 요인을 이해하고 도움을 주기 위한 상담법을 소개한 정진원 상담사는 “학생들은 교수님이 주는 도움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상담실에서 여러 번 상담하는 것보다 교수가 이름을 불러주고, 차 한 잔 마시며 이야기를 권하고, 관심 어린 시선으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이 더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2020년 천명선·남상섭 교수팀이 국제학술지 수의교육학회지(JVME)에 발표한 설문 연구에 따르면, 국내 수의과대학 재학생의 30~40%가 심각한 수준의 우울, 불안, 스트레스를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관련해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은 2019년부터 전문 상담사를 통한 학생 상담을 실시하고 있다. 수의과대학 건물에 상담을 위한 별도 공간도 마련했다.

학내 여러 학과에서 학생들을 만나는 정진원 상담사가 매주 하루씩 수의대에서 정기적으로 상담한다. 학업과 진로, 대인관계 등 다양한 요인으로 정신건강을 위협받는 학부생과 대학원생이 상담실의 문을 두드린다.

이날 정 상담사는 학업과 관련한 스트레스 요인으로 ‘부적응적 완벽주의’를 거듭 지목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인식, 자신에 대한 가혹한 평가기준이 학생들을 괴롭힌다는 것이다.

정 상담사는 “학점이 매우 높은 친구들도 성적이 낮은 친구들 못지 않은 비율로 상담실을 찾는다”면서 “스스로에게 너무 지나친 기대를 부여하고, 실패는 없어야 한다고 여기는 ‘부적응적 완벽주의’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성적이 높은 학생은 등수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 등수가 낮아지면 나락에 갈 것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반대로 성적이 매우 낮거나 유급 위기에 처한 학생에 대해서도 ‘실패를 절대 할 수 없다’고 여기는 학생인 경우가 있다고 지목했다. 잘하고자 하는 욕망이 너무 강해서, 완벽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포기해버린다는 것이다.

정 상담사는 “유급이나 학사경고 상태는 심리적 고위험군으로 분류한다”면서 “단순히 학습전략이 잘못됐거나 게으르다는 문제가 아니라 켜켜이 쌓여 온 대인·가족관계 문제, 정서적·경제적 환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수의대 실습수업에서 살아 있는 동물을 사용하는 경우 ‘동물에게 가해하는 느낌’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학생들도 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렵지만 해내는 반면, 트라우마 등 개인적인 경험과 결부되는 학생은 심한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다.

정 상담사는 “실습의 필요성과 함께 실습 과정 중 여러 부정적인 감정이 들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알리고, 힘들면 담당 교수나 상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안내해주시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수의대 특유의 폐쇄적인 환경도 수의대생이 겪는 스트레스의 특징으로 작용한다.

수의대는 함께 입학한 학우들과 대부분 6년간 동고동락한다. 같은 물리적 환경에서 같은 수업을 듣는다. 이런 환경은 조별과제나 실습에서 무능함을 드러내거나 같은 조 친구들이 피해를 보는 상황을 더욱 두려워하게 만든다.

일반적인 대학생이라면 ‘이번 과제가 끝나면 다시 안 봐도 되는 사람들’이 조원인 경우도 많지만, 수의대는 졸업까지 한 공간에서 생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 상담사는 “집단 안에서 잘못 낙인이 찍히거나 안 좋은 소문이 돌며 소외되는 상황에 대한 공포가 굉장히 크다”면서 “뒷담화, 루머, 편가르기가 소속감을 유지시켜주는 기제로 작동하면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지목했다.

타대생은 자기 학과의 틀에서 벗어나 중앙동아리에서 활동하거나 다른 삶의 터전에서 ‘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상대적으로 많은 반면 수의대는 수의대 자체 동아리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고 대학생활에 유용한 정보도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다 보니 환기의 통로가 좁다.

정 상담사는 “수의대생은 평가·비교에 대한 불안도 많이 경험한다”면서 “좁은 업계에서 평판이 나빠지면 앞길이 막힐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불합리한 대우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고 지적했다.

정진원 상담사는 수의과대학 교수진이 학생들의 스트레스 대응과 정신건강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전문적인 상담 서비스도 필요하지만, 평소에 교수가 학생에게 주는 관심이나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 상담사는 “학생들은 일상 안에서 만나는 교수의 말 한마디에 자부심이 높아지거나, 연구의욕이 커지거나, 용기를 얻는다”면서 학생과의 소통을 위한 첫걸음도 조언했다.

정 상담사는 “경청과 공감, 뻔한 조언이지만 너무 어려운 일이다. 학생들은 어디에서도 눈을 마주치고 몸을 기울여 들어주는 ‘경청’을 받을 수 없어 상담실로 온다”면서 학생의 말이나 행동에 당장 공감하기 어렵더라도 비판하지 않고 ‘더 자세히 알려달라’고 요청하기만 해도 좋다고 조언했다.

교수에게 도움이나 상담을 요청한 것만으로도 문제해결 의지와 용기가 있는 학생이라는 점을 지목하면서, 필요하다면 대학 본부나 지역 의료기관을 통해 보다 전문적인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는 점을 덧붙였다.

‘부적응적 완벽주의’ 스스로에게 가혹한 기대치에 괴로워하는 수의대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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