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진원 상담사, 5년간 수의대생 만나 보니..

“마음이 힘든 것 자체를 ‘나약하다’며 스스로 비난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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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병의 근원으로 불리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것, 바로 스트레스입니다. 현장에서 동물을 살리고 보호자를 설득해야 하는 수의사는 말할 것도 없고, 수의대생들도 학교에서 다양한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갑니다.

서울대 수의대에서 5년여간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을 만나 심리상담을 진행하고 있는 정진원 상담사(사진)를 데일리벳이 만났습니다.

안녕하세요, 정진원입니다. 2009년 서울대 심리학과에 입학했다가 상담에 흥미를 느껴 사범대 교육학과 대학원에서 교육상담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사회과학대학 심리학과에서 다루는 상담은 주로 병원을 매개로 아픈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는데요, 저는 일상의 대학생을 상담하는 쪽에 관심이 더 있어서 교육학과로 왔습니다.

   

전문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서울대 대학생활문화원에서 2017년부터 2019년까지 풀타임 상담사로 일했습니다. 특정 단과대가 아니라 서울대 관악캠퍼스에 있는 모든 학생들이 오는 곳이죠.

그러다 박사과정에 진학하게 되면서 파트타임 상담일을 찾았는데, 마침 수의과대학에서 상담실을 만든다는 공고를 접했어요. 수의대에 친한 친구도 있어서 낯설지 않았죠.

   

학생들이 호소하는 문제에는 사실 큰 차이가 없어요. 학업, 진로, 대인관계에 관한 고민이죠.

다만 수의대에는 타 대학에선 흔치 않은 ‘유급’ 제도가 있다 보니, 이와 연관되어 학업에 대한 공포가 큰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번 신임교수 워크숍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같은 학년 학생들과 함께 진급하고 물리적으로도 같은 환경이 유지되는 것에서 오는 대인관계 고민도 큽니다. 무리 안에서 본인의 이미지가 조금이라도 나빠지거나 안 좋은 소문이 퍼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커요. 대학을 너머 수의사 업계도 좁다는 것까지 걱정할 정도입니다.

아무래도 학교 안에서는 시야가 좁을 수밖에 없다 보니 이런 불안에 빠지면 빠져나오기 힘든 것 같기도 해요.

5년간 상담하면서 수의대생 분들께 받은 인상은 참 순하고 말을 잘 들으신다는 겁니다. 서울대 내의 다른 전공 학생들과 비교해서도 그래요. 동물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 그런가 싶기도 합니다(웃음).

    

대인관계에 관한 고민이 많아요. 사실 학업이 좀 잘 안되어도 대인관계가 좋으면 다 같이 이겨내기도 하고 웃어 넘길 수 있는데, 대인관계가 좋지 않으면 더 돌파구를 찾기 어려워집니다.

대인관계 문제가 학업이나 진로 고민에까지 영향을 주는 경향을 수의대에서 더 많이 보게 됩니다. 공부가 잘 안되어서 불안한 이유도 ‘주변 사람에게 무능하게 보일까봐’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인 경우가 여기에 해당되겠죠.

사실 이런 인정욕구는 어느 전공이든 있지만, 수의대는 폐쇄적인 환경이다 보니 ‘한번 인식이 박히면 바뀌지 않는다’는 불안이 큰 것 같습니다.

    

그런 학생분들은 정말 많아요. 차라리 찾아와서 ‘이런 게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하면 본인의 마음을 잘 알게 되고 상담할 거리도 많은데 말이죠.

학생들은 자기가 어려움을 느끼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경향이 있어요. 얘기를 하려다 가도 스스로 멈추고 ‘이건 고민이라고 하긴 좀 그런 거 같아요’라고 선을 긋는 거죠. 다른 애들도 다 듣는 수업이고 다 잘하는 것 같은데 내가 나약하고 징징대는 것 같다면서요.

심지어는 상담사가 ‘별것 아닌 일로 상담을 왔다’고 생각할까봐 걱정된다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이거 되게 사소한 건데..’라고 말을 시작하면 절대 사소하지 않은 이야기가 뒤따르는 법이죠(웃음).

정진원 상담사는 사범대학에서도 심리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수의대 상담실이 현재 공사중인 관계로 인터뷰는 사범대 심리상담실 ‘사담’에서 진행됐다.

구글폼으로 신청서를 보내주시는 것이 첫 번째 단계입니다. 저만 배타적으로 볼 수 있는 양식이에요. 써 주신 내용을 제가 확인한 후 상담 일정을 잡습니다.

처음에 오면 심리검사를 먼저 합니다. 설문 형태도 있고, 그림 검사 종류도 있고..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됩니다.

상담은 매주 한 번씩, 총 15주간 진행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세션 1회당 50분씩 하고요, 상황에 따라 상담기간을 늘리기도, 줄이기도 합니다. 문제에 따라 상당히 장기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어요. 3년을 넘게 한 적도 있습니다.

상담은 주의를 많이 들여야 하는 일이라..하루에 4명이 최대인 것 같아요.

일선의 정신건강의학과와의 연계도 잘 되어 있습니다. 상담을 하다가 약의 도움이 필요하겠다 싶으면 정신건강의학과에 진료를 의뢰하기도 하고, 의사 선생님께서 상담을 받아보라고 했다며 찾아오는 반대의 경우도 종종 있죠. 서울대 보건소에도 정신건강의학과가 있으니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상담사 한 분이 더 오셔서 상황이 많이 나아졌지만, 초반에는 대기 시간이 좀 길었어요. 처음에는 수의대 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다 보니 별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막상 해보니까 그렇지 않더라고요. 학생들이 몰릴 때는 4~5개월까지 대기기간이 늘어났어요.

수의대는 커리큘럼이 빡빡해서 대학생활문화원 상담을 이용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사실 교내의 많은 상담실이 하는 공통적인 고민이 대기입니다. 사범대 상담실도 2개월은 대기해주셔야 해요.

    

요즘은 MBTI의 영향 때문인지 심리검사만 받고 싶다는 요청도 많아요. 딱히 힘든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는 거죠. 이럴 때는 심리검사와 그에 대한 해석만 받는 1회성 상담으로 끝나긴 합니다.

다만 진짜 순수한 호기심에 신청한 학생이 있는 반면 개인상담으로 가기 위한 ‘도움닫기’가 되는 경우도 있어요. 심리검사를 하다 보면 그때 고민을 털어놓는 거죠.

   

학부생 상담이 그래도 더 많긴 해요. 7:3 정도인 것 같네요.

연구실의 대인관계는 학부생 시절보다 더 소규모가 됩니다. 돈으로도 일로도 더 강하게 엮여 있죠. 그러한 환경에서 각자가 느끼는 힘듦의 정도는 사람별로 다른 문제긴 하지만요.

대학원생이라고 해서 교수님과의 갈등이 표면화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교수님께 잘 보이고 싶은데 성과가 잘 나지 않는다거나, 다른 실험실 동료에 비해 자기가 떨어져 보이면 교수가 자신을 무능하게 생각할까봐 불안을 겪죠.

이런 부담감 때문에 실험실 업무나 연구 일을 분배할 때 본인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 와도 잘 조율하지 못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일단 예스맨이 됐다가 번아웃으로 넘어가는 거죠.

임상대학원과 기초대학원의 차이는 크게 없는 것 같아요. (대학동물병원) 진료와 관련된 스트레스 호소는 별로 없고, 문제가 있다면 연구실 안의 대인관계인 경우가 많습니다.

    

애초에 학생상담실이라 대상이 아니긴 합니다만, 개인적으로는 정말 교수님들께도 상담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학이라는 곳 자체가 교수에게 주어지는 역할이 다양하고 많다 보니 스트레스도 커요. 교수의 마음이 힘들면, 그게 학생에게도 전달되요. 성과에 대한 압박감이 밑으로 내려가고, 교수가 조급하면 학생들도 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죠.

교수에게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학생이 도움을 요청해도 ‘라떼는..’으로 흐르거나, 본의 아니게 학생에게 상처를 주는 상황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찾아보시면 지역마다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자체 건강가정지원센터도 있고, 사설 심리상담센터도 곳곳에 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로 가셔도 되고요, 어디든 내키는 곳을 찾아주시면 됩니다.

중요한 건 마음이 힘든 상태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해결의 의지를 보이는 겁니다. 마음이 힘든 것을 ‘나 스스로 이겨내야 할 문제고, 그렇지 못하면 나약한 것’이라고 여기는 편견을 버려주세요.

    

사실 심각한 사고는 상담실조차 찾아오지 않은 채 일어나곤 합니다. 상담실에 왔다는 것 자체가 무척 반가운 일인 거죠.

힘듦에 대해서 자기가 스스로 가혹하게 평가하는 것 때문에 더 힘들어지곤 합니다. ‘다른 애들이라고 힘든 게 없겠어?’라고만 여기면, 가뜩이나 힘든 마음이 더욱 설 자리가 없어져요. 그러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일을 혼자서는 극복하기 힘든 경우도 많잖아요? 상담실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문을 두드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인터뷰] 정진원 상담사, 5년간 수의대생 만나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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