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 준비는 아직인데 포장박스부터 고르나’ 수의대 6년 학제 개편 두고 우려
전국 수의대 교수 연수교육서 학제 개편 조명..교육과정 개편이 먼저다
‘곧 발렌타인 데이인데..학제 개편 논의를 보고 있자면 어떤 선물을 얼마나 살지는 제쳐두고, 일단 포장 박스부터 고르고 있는 것 같다’
2월 11일 건국대 수의대에서 열린 수의과대학 교수 연수교육에서 학제 개편을 주제로 발표에 나선 남상섭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으로 수의과대학 학제에 자율성이 부여되면서 1+5나 통합6년제 도입이 가능해졌다. 일부 대학은 학제 개편을 가시화하는 단계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학제 개편인지부터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졸업생 역량강화를 목표로 통합교육·임상실습 확대를 위한 방법을 고민하면서 학제 개편을 추진한 의대와 달리 수의대는 ‘학제부터 일단 바꿔보자’는 식으로 흐르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전북대 수의대 1+5 학제 개편 임박?
학제 바꿔야 할 구체적 교육과정 개편안 선행되야
지난해 2월 고등교육법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예2+본4로 고정됐던 의학계열(수의대·의대·한의대·치대) 학사학위과정의 수업연한 규정이 사라졌다.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게 됐다. 3+3이든 1+5든 통합 6년제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개정 직전 열렸던 한국수의과대학협회 심포지움에서부터 수의대에서도 학제 개편 논의가 촉발됐다. 남 교수는 “당시에는 10개 대학이 보조를 맞추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1+5 혹은 통합 6년제로 가고 있다는 대학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학제 개편의 선두에는 전북대 수의대가 보인다. 이날 연자로 나선 이기창 전북대 교수에 따르면, 전북대 수의대는 1+5 학제 개편안에 대한 본부 차원의 검토가 진행 중이다. 이르면 당장 올해 입학생부터 1+5 학제가 적용된다.
남 교수는 “수의대는 교육에 관해서는 유독 기존 관행을 그대로 따르거나 이론적 배경을 충분히 살피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꼬집었다. 의대에서 촉발된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 배경을 잘 살펴야, 수의대도 올바른 학제 개편 방향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학제 개편에 이르기까지 진행됐던 의학 교육 개선 논의를 소개했다. 조기 임상노출을 포함한 나선형 교육과정 도입, 통합형 교육과정과 임상교육을 강화하려면 의학교육 시간이 더 필요했고, 그래서 예과로 분리됐던 2년까지 함께 활용해야 했다는 것이다.
입학 직후부터 전문직 본연의 정체성을 확립해나가야 한다는 필요성도 함께 지목됐다.
의료정책연구소가 ‘의사양성 학제 개편에 관한 연구’에서 제시한 통합 6년 기본의학교육과정 모델은 임상전교육(이론) 3년과 임상교육 3년으로 구성된다. 이론과정은 전문 과목 구분 없이 통합 연계형으로 구성한 나선형 교육과정을 채택한다.
3년으로 늘어난 임상교육에는 학생인턴 기간과 개인맞춤형 선택임상실습의 비중이 커진다. 기존 로테이션이 과별로 2주 내외의 단편적 경험만을 제공할 수 있는데 반해, 6개월에서 1년까지 학생들이 특정 환자의 진료를 장기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장기통합임상실습(Longitudinal Integrated Clerkship)도 도입할 수 있다.
해외 의학교육이 대부분 예과 과정 없이 입학 직후부터 의학교육을 바로 시작하고, 최소 3년 이상의 임상실습을 진행한다는 점을 고려했다.
바꿔 말하면 이 같은 교육과정을 운영하기 위해 예과 2년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고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한 셈이다.

(자료 : 의료정책연구소, 의사양성 학제 개편에 관한 연구)
남 교수는 “1+5냐, 통합 6년제냐 논의하기에 앞서 교육과정 개편을 추진하여 그에 맞는 포장지를 택해야 한다”면서 “(학제 개편부터 다루는 건) 선후가 뒤바뀐 셈”이라고 지적했다. 교육과정 개편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의대와 같은 수준의 6년 통합형 교육과정을 도입하기는 현실적으로 굉장히 어렵다면서도, 부분적으로 도입할 수 있는 개선점이 여럿이라는 점을 함께 지목했다.
교육과정 개편을 위한 방법론도 제시했다. 교육과정 개편 주체인 ‘교육과정위원회’를 먼저 제도적으로 정비하고, 교육과정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 교수는 “3주기 수의학교육 인증기준에서는 ‘교육과정위원회’ 운영을 요구하고 있다. 교육과정 개편에는 모든 교수가 참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기창 교수도 “(교수 전원이 참여하는) 교수회의에 교육과정 개편을 기대하기 어렵다. 교육과정위원회에 권한과 책임을 부여해 끌고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학내 모든 교수의 의견과 동의를 구하는 식으로는 추진해서는 현실적으로 성사시키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어 크게 ▲공통교양·수의학교양·기초과학 ▲기본수의학 ▲임상수의학 ▲전문직업성 ▲임상실습 ▲선택교과로 구분되는 수의대 교육 단계별로 비중과 교육내용을 설정하고, 수평·수직적 통합교육을 가능한 도입한다.
가령 신장의 해부, 조직, 생리, 약리 등 기본수의학 과정 내에서 통합한다면 수평통합에 해당한다. 폐의 해부·조직을 배우면서 엑스레이 촬영상의 특징을 함께 다룬다면 수직통합이라 볼 수 있다.
남 교수는 “당장 교육과정을 전면적으로 통합 운영하기는 어렵다. 좋은 사례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먼저”라고 지목했다.
이러한 시도를 하면서 본과 4년만으로 부족하다면, 1년이나 2년의 추가 시간이 주어지면 어떻게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분명하다면 그제서야 학제 개편 논의가 필요해지는 셈이다.

학제 개편으로 임상교육 시간 늘려도..잘 채울 수는 있나?
이처럼 의대에서 출발한 교육과정과 학제 개편 논의는 효율적인 교육과 함께 임상교육의 확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실제로 해보거나, 현장에서 진행되는 교육이 졸업역량을 갖추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수의대에서의 문제는 여기에도 있다. 학제를 바꾸고 교육과정을 효율화하여 임상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시간을 늘린다 한들, 이를 잘 활용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최양규 건국대 수의대 학장은 “지금도 임상로테이션을 운영하면서 대학 동물병원과 외부 협력동물병원의 수용 능력이 걱정인데, 임상교육을 더 늘리려면 그만큼 병원의 능력과 대학의 지원이 전제되어야 한다”며 “아직 건대에서는 학제 개편 논의가 활발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후 건국대 동물병원 신축이 가시화되면 학제 개편 논의도 본격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건대의 교원수나 동물병원 규모를 고려하면, 다른 수의과대학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임상교육을 충분히 실시할 수 있는 여건이 준비되지 않은 채 학제의 포장지만 커지면, 결국 이론교육만 많아지는 형태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1998년 6년제 전환 시 겪었던 문제를 되풀이하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