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에 나선 이유
본과 1학년 여름방학 농림축산검역본부에 실습을 신청한 적이 있었다. 검역본부가 어떤 역할을 하는 기관인지, 그 곳에서 일하는 수의사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호기심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2주간의 짧은 실습이었지만, 실습을 통해 느낀 바는 수의학도로서의 마음가집에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실습 전인 본과 1학년 1학기, 생화학 과목을 수강하면서는 매주 바뀌는 실험실습에 보고서를 써내는데 급급했다. 당시로는 처음 해보는 실험이었고, 다른 과목의 시험이나 실습을 준비하는데 바빠, 내가 배우는 실험에 대해 더 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검역본부에서 실습하면서 농장에서 가져온 혈액으로 지난 한 학기 동안 배웠던 실험을 실제로 사용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전까지는 실험방식 자체만 이해하려 했다면, 검역본부 실습을 계기로 ‘왜 이 실험을 하는지’, ‘얻고자 하는 결과가 무엇인지’, ‘그 결과를 어떻게 적용시킬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시야가 넓어졌다. 이론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더 공부해야겠다는 필요성도 느꼈다.
그 때부터 부족한 부분을 깨우치고 좀더 발전하려면 현장의 실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IVSA에서 공고한 개인 교환학생 프로그램에도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왜 태국이었을까
언젠가 데일리벳에서 태국 카세삿(Kasesart) 수의과대학 탐방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규모도 규모였지만 세분화된 진료과목, 혈액은행까지 갖춘 시설을 보고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마구 들었다.
마침 카세삿 대학에 내 유일한 태국 수의대 친구도 있어서 여러모로 적합한 기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습을 신청한 후 당시 IVSA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사실 IVSA 한국지부에서는 처음으로 실습 문의를 드린 기관이라 잘 안 될 줄 알았는데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왕립대학교인 만큼 실습비의 부담도 있었고, 임상과목을 배우지 않은 상황에서 대학병원 실습을 가는 것에 부담을 느꼈다. 그렇게 카세삿 대학은 다음을 기약했다.
대신 태국 IVSA 임원이 추천해 준 치앙마이 나이트 사파리에 가보기로 최종 결정했다.
실습 일정은
나이트 사파리에서 실습생들의 일정은 본인이 원하는 바나 학년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
임상과목을 배운 5,6학년들의 경우 실습기간 대부분을 동물병원에서 수의사들과 실습한다.
나처럼 아직 임상과목을 배우지 못한 4학년 이하 실습생들은 실습 기간 동안 동물병원 실습과 사육사 실습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한다.
자세한 일정은 아래와 같다.
실습하는 동안 사용한 언어는 영어였다.
수의사분들이 직접 나에게 설명해주실 때에는 영어를 사용했다.
태국 실습생들과 함께 설명을 듣거나 실제 치료현장에서는 태국어로 진행하는 대신, 태국 친구들이 영어로 간략하게 통역해주는 식이었다.
사육사분들과 함께 일할 때는 같은 팀이었던 태국친구들이 내 질문 등을 태국어로 통역해주고 답변을 다시 나에게 영어로 통역해주기까지 했다.
아마 이렇게 친절한 친구들이 주변에 없었다면, 태국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실습을 무사히 끝마쳤을까 싶다. 하다못해 점심을 시켜 먹는 것조차 힘겨웠을 것 같다.
7/2~3 동물병원
첫 날의 시작은 동물병원에 입원한 동물들의 밥을 챙기는 일이었다. 알비노부터 새끼 양까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내원한 다양한 동물들이 있었다.
먹이 준비를 하고 있으면 새끼 양이 어느새 와서 리어카에 실린 먹이를 훔쳐(?) 먹곤 했다. 말리기에는 심각하게 귀여웠다.
그러고 나서는 수의사분들을 따라 아픈 동물들에게 갔다. 처음만난 동물은 기린. 다른 동물원으로부터 이사 온 기린이었다.
나이트 사파리에 도착한 후에는 밥도 잘 먹지 않고 설사증상이 있어 일단 혼자 격리시켜 놓은 상황이었다.
설사 증상에 대해 항생제를 투약하는 치료가 진행됐다. 항생제는 블로우건으로 주사해야 했다. 5ml씩 8개의 주사기가 쓰였는데 이 때 처음으로 블로우건용 주사기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
치료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별다른 호전이 없었다. 현지 수의사들의 논의에서 ‘지난 동물원에서는 먹이가 지금보다 다양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사 온 것도 스트레스였을 텐데 전보다 부족한 먹이로 잘 먹지 않게 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카시아 꿀 등으로 먹이를 다양화하기로 결론지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찾아보니 살기 위한 아카시아 나무의 진화와 아카시아 꿀을 먹기 위한 기린의 진화 이야기를 볼 수 있었다)
7/4~16 사육사 및 먹이담당 실습
실습기간 3주 중에 2주 동안은 사육사에서 실습했다. 사육사 실습의 주된 업무는 청소와 먹이준비다.
3일에 한 번씩 다른 사육사 팀으로 이동했는데 언제 어디서든 하루의 시작은 빗자루 청소와 물청소였다.
청소 후에는 초식동물에게 건초와 옥수수 잎, 과일 등을 잘라서 먹였다. 육식동물은 먹이 시간이 오후라 실습생들이 직접 준 적은 없었다.
카피바라는 뾰루퉁한 생김새가 매력이다. 먹이가 와도 느릿느릿 다가오고, 청소하다가 실수로 가까이 가도 느릿느릿 도망가는 움직임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니알라(Nyala)들은 무리지어 생활한다. 등의 흰색 줄무늬가 아름다웠다.
사육사에서 만난 암사자는 새끼사자 네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네 마리 새끼가 다같이 장난치면서 잘 놀았던 기억이 난다.
7/18~22 다시 동물병원으로
태국에는 코끼리 사육사(Elephant Keeper) 분들이 따로 있다. 이들은 매일 오전 코끼리들을 데리고 식사장소로 떠났다.
나이트 사파리에서 20분 정도를 걸어가면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호숫가에 건초와 옥수수잎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코끼리들은 대략 2~3시간 정도 식사시간을 갖는다. 준비된 잎들을 먹고 나서는 호수에서 샤워를 한 번씩 한 후 산으로 올라가 좋아하는 나무들을 열심히 먹는다.
치앙마이 나이트 사파리 실습에서 가장 잊혀지지 않는 가슴 아픈 케이스는 다리 부상으로 일어나지 못하는 코끼리였다.
사육사는 ‘전날 밤부터 넘어져 있던 코끼리가 밤새 일어나지 못했다’고 했다. 이제는 스스로 일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수의사와 사육사들이 힘을 합쳐 코끼리를 일으켜 세워 보기로 했다.
굵직한 기계들이 두 대 정도 동원됐고, 열댓명의 사육사와 수의사 3명, 실습생들이 한 마음으로 코끼리가 일어나는 것을 도왔다.
하지만 일으켜도 코끼리는 발을 디디지 못했다.
두어 번을 더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히 코끼리가 디디지 못하여 다시 눕히는 일을 반복했다.
코끼리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내가 보아도 코끼리가 많이 지쳐 보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자 코끼리가 움직임을 멎었다. 숨을 거둔 것이다.
원인을 밝히기 위해 X-ray 등 정밀검사가 이어졌다. 실습이 끝나기 바로 전 날 있었던 일이라 정확한 원인을 확인할 수 없어 답답했다.
실습 후에
동물원이 지금보다 좀더 나은 환경으로 운영되었으면 한다. 당장 동물원을 없앨 수 없으니 동물에게 최대한 야생과 비슷한 환경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동물원 수의사가 되고 싶었다.
치앙마이 나이트 사파리에서 여타 초식동물들은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육식동물과 코끼리들은 그에 비해서는 부족한 환경이었던 것 같다.
이번 실습을 통해 동물원 복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이 생겼다. 물론 수의학적으로 부족했던 부분에 대해 열심히 공부하고 싶다는 계기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더 좋은 동물원 수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나라의 동물원을 보고 어떤 환경이 그나마 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바람직한 환경인지 공부할 필요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