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하기까지..
본과 2학년 내내 나는 끊임없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내가 뭘 하고 싶은 지도 잘 모르겠고, 쌓아 둔 것도 없고, 학점을 잘 챙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동아리나 외부 활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직업인으로서 내 미래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본과 2학년 겨울방학부터는 스스로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실습을 해보리라’ 마음먹었지만 지원한 곳은 떨어지거나 자리가 없었다. 결국 종강까지 나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낮은 학점을 확인한 뒤 더 우울해진 마음으로 데일리벳과 여러 수의대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던 중,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 홈페이지에서 서울아산병원의 비교병리연구실에서 16년 동계 실습생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았다.
현미경을 이용해 조직을 보는 것에 흥미가 있었고 신약을 개발하는 데 있어 수의사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고 싶어 간단한 이력서를 연구실로 보냈다(wcson32@hanmail.net).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굉장히 빠른 답장을 받았고, 바로 다음 주에 면접을 보러 갔다. 교수님은 흔쾌히 나를 실습생으로 받아줬고 그렇게 한 달 간의 실습이 시작되었다.
왜 외부 실험실이었나?
‘실험실에 한 번 들어가 볼까?’ 이과 계열의 대학생이라면 한 번쯤 해보는 고민이다. 그 뒤론 ‘어느 실험실에 갈까?’ ‘무엇을 기준으로 실험실을 고르는 게 맞을까?’ ‘자대 실험실과 외부 실험실 중 어딜 가야 하나?’ 등등 고민의 연속이다.
사실 본인도 ‘자대 실험실에 소속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학교 내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좋다’는 한 선배의 말이 귓가에 울리기도 했다.
하지만 자대 실험실의 이야기라면 동기나 선배들로부터 많이 들어왔고 실습을 할 때도 몇 번 간 적이 있었지만 타대 실험실은 어떤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궁금증이 일었다.
무엇보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의사인 교수가 운영하는 실험실에선 무슨 일을 하는지, 인의병원에서 수의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실습 내용
내가 이 실험실에서 한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셋 모두 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와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CMO란 의약품의 제조 및 품질관리, 전임상 등의 절차를 대행하는 업체를 뜻한다. 신약 개발은 전형적인 high risk-high return 산업이다. 신약개발 과정은 끊임없이 독성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이 때 여태까지 축적된 데이터를 살펴보거나 다양한 추가 실험을 시행해 물질의 비임상 안전성 문제 및 독성 이슈를 파악하고 해결하는 것이 CMO가 하는 일이다.
비교병리실이 운영하는 비임상 개발 센터의 역할 또한 이와 비슷하다. 지식의 깊이가 변변치 않은 학부생인데도 교수님께서 정말 다양한 프로젝트에 참여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다.
치료제의 독성이 나타난 조직 슬라이드 판독하기
A제약 회사에서 치료제B를 개발했다. 하지만 치료제B는 간 독성을 일으키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 얼마 동안 어느 농도에서 투여했을 때 독성이 나타나는지를 보기 위해 마우스를 농도별, 투약 기간별로 군을 나눠 실험을 실시한다. 실험 끝에 마우스의 간 조직을 만들고 이를 회사 소속 Pathologist나 외부의 Study pathologist가 판독한다.
Study pathologist의 판단만으로는 객관성이 부족할 수 있다. 때문에 Peer review pathologist에게 판독한 내용이 정확한지 확인을 요청한다.
이 같은 방식으로 실험실에는 수백 장의 슬라이드가 배송되어 판독 과정을 거쳤다. 병리학자에게 정확성과 높은 집중력을 요구하는 작업이었다.
본인은 수천 장의 슬라이드를 교수님이 보기 편한 순서로 정리하고 건네 드리는 조수 역할을 했다. 같은 조직을 수백 장씩 보니 눈이 핑핑 돌았다. 조직학과 병리학 시간에 공부한 내용과 유사해 두 과목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약물의 효능평가시험 계획서 작성하기
C회사에서는 무좀 치료제D를 개발 중이다. 이론적으로 치료제D는 무좀 치료에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실제로 효과가 있는지를 검증해야 한다. 제약회사 스스로 효능평가시험을 디자인할 수도 있겠으나 각종 비용 절감을 위해 CMO에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의뢰 받은 CMO 측에서는 여태까지 무좀 치료제의 효능평가시험이 어떤 동물을 이용하여 어느 기간 동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해당 동물의 생리학적 특징 등 다양한 정보를 추합하여 시험의 세부사항을 계획하고 이를 토대로 평가시험을 실시한다.
본인은 시험 계획서를 작성하는 데 필요한 기초적인 자료를 모으고 초안을 작성하는 일을 했다. 빈틈이 많은 초안이었지만 조교님의 손길을 거쳐 완벽한 시험 계획서가 되었다.
데이터 수집(Data mining)에 관련된 자료 정리하기
한 화학성분에서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일까? 여태까지 축적된 해당 약물에 관한 데이터를 조사하는 일일 것이다.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정보를 창출하는 행위를 Data mining이라고 한다. 우리가 과제할 때 의지하는 소위 ‘구글링’과 비슷하지만 좀 더 확장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 개발을 할 때나 개발한 약이 부작용이 없는지 모니터링을 하려면 해당 성분의 독성학 및 약리학적, 임상적 정보를 얻기 위해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 여러 개를 조사하게 된다.
이 때 조사의 대상이 되는 여러 데이터 베이스와 이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법을 총망라하여 5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그 외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여러 회사 사람들이 실험실을 찾아 오곤 했다. 주로 제약회사 사람들로 출시될 제품의 비임상실험 결과에 대한 해석 및 조언을 교수님께 얻으려고 찾아온 것 같았다.
해당 약품을 시험한 조직절편이나 여러 연구결과를 들고 와 연구실 사람들과 함께 관찰하며 토론을 나누는 모습을 보며 수의사가 제약업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느낄 수 있었다.
실습이 끝나고 나서..
수의사가 제약업계로 진출한다는 이야기를 학교에서 많이 들었지만 정확히 어떤 일에 관여하는지는 실습 전까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달간 이 곳에서 일하면서, 수의사는 제약업계에서 현미경으로 조직을 관찰하거나 비임상 및 임상실험을 기획하는 일을 주로 맡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기업체에서 근무하거나 기업을 상대하는 것이다 보니 금전적인 보상도 비교적 큰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또한 오랜 트레이닝 기간을 거쳐 경쟁력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기업체에서 근무하고 싶은 수의대생 친구라면 꼭 한 번 해보길 추천한다. 학부생인 나에게도 조직을 관찰할 기회가 많이 주어진 것을 보면 최소 조직학(병리학까지 배웠다면 더 좋을 것이다)까지 이수한 학생이 지원하면 더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 것도 없이 학년만 올라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을 다니거나 쉬는 것이 전부였던 방학을 몇 번 보내고 나니 ‘시간을 허비하기만 하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 처음으로 방학 때 두 군데에서 실습을 했다.
실습하는 과정에서 내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우울함은 조금씩 사라지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뭘 하고 싶은 지가 조금씩 보였다.
실습 후기를 열심히 찾아보고 있는 후배가 지금 내 후기를 읽고 있다면 자신의 학년 및 학업 성취도와 상관없이 많은 걸 참여해보라고 조언하고 싶다. 물론 아는 것이 많을수록 얻어가는 것도 많다는 건 사실이지만 자신이 몰랐던 분야에서 실습해보는 것 자체가 주는 의미가 굉장히 크다.
끝으로 실습 내내 많은 기회를 주신 손우찬 교수님과 도움도 주시고 틈틈이 간식까지 챙겨 주신 조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