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동물병원협회의 제13회 국제학술대회가 8월 3일(금)부터 5일(일)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됐다. 바로 옆에서는 소비자 대상의 ‘펫 박람회’인 ‘펫서울카하 2018’행사가 진행됐다.
펫서울카하 부스를 돌아보니 몇 가지 눈에 띄는 제품들이 있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 동물병원 전용 제품으로 판매되던 간식, 사료, 보조제 등이 현장에서 일반 소비자들에게 전시·판매되고 있던 것.
가뜩이나 동물병원을 통한 사료·용품이 줄어들고 있는 와중에 동물병원 전용 제품이 B2C 형태로 일반 소비자들에게 직접 판매되는 건, 분명 수의사들에게 달갑지 않은 현상이다.
그렇다면, 업체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일까?
물론, 동물병원에 들어가는 제품이라는 ‘프리미엄’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동물병원만을 통한 유통 전략을 유지하다가, 브랜드 인지도가 쌓이면 일반 소비자 쪽으로 눈을 돌리는 업체도 있다. 수의사로서는 이용당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고, 이런 업체가 많아질수록 동물병원 전용 제품에 대한 불신도 증가한다.
하지만, “수의사 대상 홍보·마케팅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가고, 요청에 맞춰 학술대회 후원·전시 참가를 해도 판매 증진이 미비하다”고 말하며 동물병원 유통을 포기하는 업체도 늘고 있다.
동물병원 수의사를 대상으로 제품을 출시하면, 수의사협회 컨퍼런스와 각종 학회에서 후원 요청이 빗발치는 데, 관계 때문에 요청을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매년 후원 요청 금액이 증가하고, 부스 참가비뿐만 아니라 경품으로 사용할 현물을 요청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컨퍼런스가 등장하는 것도 업체 입장에서는 부담이다.
당장 올해만 해도 컨퍼런스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처음으로 생긴 컨퍼런스가 있었다. 업체 입장에서는 졸지에 같은 지역에 후원해야 할 행사가 2개로 늘어난 것이다. 참가하는 수의사 수는 나뉠 텐데, 요청된 후원금액은 줄어들지 않았다. 후원 비용만 2배로 늘어난 꼴이다. 심지어 ‘경쟁 컨퍼런스에 후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은 업체도 있다.
협회 컨퍼런스 후원이 매출 증대와 연관 없다는 업체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업체 관계자는 “협회에서 부스 참가를 요청하면, 대부분 거절 없이 참가하지만, 실제 일선 동물병원에 가보면 (부스 참가를 하지 않지만) 마진이 더 좋은 경쟁 제품이 진열되어 있다”고 한탄했다.
업체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쓰고, 제품 판매는 잘되지 않으므로 실망할 수밖에 없다.
수의사 회원의 불만도 있다.
“협회에 수천만 원에 후원금이 들어가봤자, 결국 해당 업체는 일선 동물병원의 납품가를 올려 손해를 메꾸지 않느냐”며 “결국 협회가 돈 벌고, 개별 일선 회원들이 그 비용을 1/n로 부담하는 것밖에 안 된다”.
한 수의사의 말이다.
현재 대형 지부수의사회 컨퍼런스의 부스 참가비용은 최대 수 천만 원.
참가비용뿐만 아니라, 주로 주말에 컨퍼런스가 개최되기 때문에 직원들에 대한 대체휴무, 증정하는 샘플, 부스 설치·해체 비용까지 생각하면 실제 업체 부담은 더 커진다.
“수의사협회 회장님을 포함한 임원진이 케이펫페어에 한 번 가서 상황을 보셨으면 좋겠다”는 업체 관계자의 말도 있었다.
수의사 행사보다 훨씬 적은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수만 명의 사람이 오기 때문에 홍보 효과가 더 크다는 것. 게다가, 소비자가 먼저 해당 제품을 찾으면, 동물병원에서도 해당 제품을 찾아 비치하는 예가 있기 때문에, 소비자 대상 제품 홍보를 하면 동물병원 입점이 더 수훨하다고 판단하는 업체도 있다.
“회사 내에 소비자 대상 제품과 동물병원 전용 제품이 있는데, 동물병원 전용 제품의 홍보·마케팅·후원 비용이 10배 정도 더 든다. 그런데, 수익은 소비자 대상 제품이 압도적이다. 수의사들에게 그렇게 큰 비용을 쏟아부으면서까지 동물병원 전용 제품군을 유지해야 하냐는 회사 내부의 의견이 나온다”.
한 업체 관계자의 의견이다. 해당 업체도 곧 수의계를 떠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동물병원 전용 제품의 수는 자꾸 줄어간다. 하지만 협회가 개최하는 학술대회는 점점 늘어나고 그 규모도 커진다. 후원받을 업체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남아있는 업체에 더 많은 후원금을 요구한다. 그렇게 업체를 짜낼수록 떠나는 업체도 많아진다.
이미 의료계는 10여 년 전에 이와 비슷한 일을 겪었다. 부작용이 점차 커지자 한국제약협회의 공정경쟁규약이 마련됐고, 거기에 리베이트 쌍벌제가 시행되면서 학회가 통폐합되고, 학술대회 부스당 후원금액 상한액이 정해졌다. 학술대회는 운영비의 자체부담률을 높이기 위해 학회 참가비와 학회 연회비를 높였고, 그 결과 오히려 학회가 자생력을 갖게 됐다.
수의계도 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인터넷을 통한 사료·간식·용품 유통 비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상황에서도 동물병원을 파트너로 삼고, 동물병원을 통한 유통을 철저히 지키는 업체가 있다면, 그 업체와 진정으로 상생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남아있는 업체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고 어떻게든 전년보다 조금 더 많이 후원금을 짜낼 생각만한다면, 결국 동물병원 전용 제품 자체가 없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