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진료비 수의사법 개정을 둘러싼 표준, 표준, 표준
진료 표준화 선행돼야..진료 정보·진료 프로토콜 표준화로 구분
동물병원 진료비와 관련된 수의사법 개정안의 4월 심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일선 동물병원의 진료환경에 큰 변화가 일어나는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대한수의사회는 다빈도 항목 우선으로 진료를 표준화한 후 해당 진료의 비용을 병원별로 책정해 게시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3년여간 진료비 관련 법 개정 논의가 이어지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자율적 표준진료제’와 함께 ‘진료 표준화’, ‘진료항목 표준화’, ‘표준진료체계’, ‘진료비 표준화’ 등 유사해 보이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다.
이번 국회 들어 발의된 동물 진료비 관련 수의사법 개정안은 현재 준비 중인 정부입법안을 포함해 9건이다. 이 중 7건이 동물 진료의 표준화와 가격정보 공개를 함께 담고 있다.
‘표준화’의 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질병명, 질병코드, 질병별 진료행위, 진료항목 등 개정안마다 조금씩 다르다.
수의계에서도 관련 논의의 오해를 줄이기 위해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관련해 지난해 농식품부 의뢰로 서울대 서강문 교수팀이 진행한 ‘동물병원 진료 표준화 방안 마련’ 연구에서는 진료 표준화를 크게 ▲진료 정보 표준화 ▲진료 프로토콜 표준화로 구분했다.
질병·진료행위 명칭 통일, 단일 코드체계 적용..진료정보 데이터화 기반
이에 따르면 ‘진료 정보 표준화’는 질병명과 세부진료행위 각각의 명칭을 표준화하고 이를 코드 체계와 연동하는 것이다.
국내 반려동물이 어떤 질병에 얼마나 걸리는지, 동물병원에서 자주 진단되는 질병이나 자주 수행하는 진료행위가 무엇인지는 베일에 쌓여 있다. ‘여름이면 피부질환 내원이 많아진다’는 식의 경험이나 느낌은 있지만 데이터에 기반해 설명할 수는 없다.
이를 알아내려면 각 동물병원에 흩어져있는 진료 정보를 하나로 모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각 정보를 기록하는 용어를 통일하고 단일화된 코드를 적용해야 한다.
일선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하며 발생하는 정보들 모두가 표준화된 명칭·코드체계 위에서 기록된다면, 의미 있는 정보 축적과 분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수의사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연구진은 인의에서 통용되고 있는 한국표준질병분류체계(KCD-7)와 유사한 ‘수의학질병코드체계(Veterinary KCD)’를 제언했다.
가령 A동물병원장이 안과로 내원한 개에서 염증에 의한 속발성 녹내장을 진단한 경우 내부 시스템에 CAH4031이라는 코드로 기록될 수 있다.
CA(개), H40(녹내장), 3(속발성), 1(염증성)로 각 자리마다 의미를 가진 진단결과가 쌓이면 질병과 진료행위에 대한 유의미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용어를 통일하고 코드체계를 만든다고 해서 진료 정보가 저절로 빅데이터가 되지 않을 것이다. 각 동물병원이 실제로 사용해야 한다는 과제가 따로 있다.
국내 동물병원에서 사용되는 전자차트 프로그램에 표준화된 용어·코드를 탑재하는 것은 물론 임상수의사의 진료기록 문화를 개선해나가야 한다.
근거기반의학으로 편차 줄이는 진료 프로토콜 표준화
개발·적용에 수의계 합의가 핵심..문헌 근거, 전문학회 검증 필요
‘진료 프로토콜 표준화’는 질환별 진단·치료 절차를 수의학적 근거에 기반해 합의하는 것이다.
가령 반려견의 슬개골 탈구라면 병인론부터 진단검사, 중증도 평가, 내·외과적 처치, 술후 관리까지 진단과 치료 과정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일이다.
국내 수의사들에게도 생소하지는 않다. 서울시수의사회가 제작해 온 동물병원임상프로토콜이나 세계소동물수의사회(WSAVA)가 개 아토피피부염의 임상진료지침(CPG, clinical practice guideline)에서 그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연구진은 질환별 수의임상프로토콜(Veterinary Clinical Protocol) 개발을 제언하면서 “수의계 전체적인 참여와 합의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기존의 프로토콜과 문헌 조사를 통해 근거를 확보하고 전문학회의 검증·인증 절차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의에서도 임상진료지침은 진료의 편차를 줄이고 환자-의사 간의 의학적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 개발되고 있다. 과거 의사의 경험과 기술에 주로 의존했던 의학에서 근거기반의학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다.
이 연구결과와 수의사회 의견을 종합하면 ‘진료항목 표준화’는 진료 프로토콜 표준화에 가깝다. 특정 진료행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표준화한다는 것이다.
‘표준진료체계’는 진료 표준화가 이루어진 진료 환경 정도로 풀이된다.
반면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인 ‘자율적 표준진료제’는 가격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공약집에도 시민 알권리 보장과 보호자 부담 완화를 명시했다. 공약의 목표가 진료비 정보를 공개하고 보호자가 지불하는 진료비를 낮추는데 있다는 것이다.
대한수의사회는 진료비 정보공개 제도화 이전에 진료 표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동일한 진료행위인데 병원마다 표기가 다르다면 소비자에게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가령 ‘슬개골탈구교정술’의 표준화된 프로토콜 없이 세부절차가 병원마다 크게 다른 채로 가격 게시가 의무화된다면, 상대적으로 간소화된 절차라 저렴한 병원이 마치 착한 병원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동물의료서비스의 하향 평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대한수의사회는 특정 진료행위의 비용을 아예 정하는 ‘진료비 표준화(표준수가제)’에는 명확히 반대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공약도 표준화된 진료에 대해 각 동물병원이 자율적으로 가격을 결정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사람 의료기관에서는 이미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비급여 진료항목의 가격 게시가 의무화되어 있다. 병원 대기실에 책자를 비치하거나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식이다.
곧 있을 국회 법안심의에서 수의사회 의견대로 수의사법이 개정된다면, 사람 의료기관의 비급여 진료비 게시와 같은 형태가 동물병원에도 적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빈도 진료항목에 대한 진료 표준화 준비를 먼저 거친다 해도 수 년 내에 진료환경이 크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위 연구에서는 진료정보 표준화, 수의임상프로토콜 개발 등에 4년간 17억원의 예산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특히 사람에서는 최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홈페이지를 통해 제공하던 비급여 진료비 가격비교 대상을 병원급에서 의원급으로 확대하고, 개별 비급여 진료 시 가격 설명을 의무화하는 등 관련 규제를 강화하고 있어 수의사법 개정에도 영향을 끼칠 지 우려된다.
4.7 재보선 이후 진행될 이달 임시국회에서 수의사법 개정 논의가 진행될 가능성이 있는만큼, 대한수의사회는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소속 의원들을 상대로 간담회를 개최하는 등 심의 대응에 나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