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업용 쇠톱 동물병원 후 7년, 품위유지의무가 법제화됐다
수의사회에 징계요구권 부여, 얼마나 활용하는지가 관건..의사 전문가평가제 참고해야
2017년 TV조선이 방영한 ‘탐욕의 동물병원’에는 공업용 쇠톱을 수술에 사용한 흔적이 있는 동물병원이 보도됐다. 해당 동물병원은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고, 당시 수의사회에서도 자정작용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잠시 높아지기도 했다.
이처럼 수의사의 품위를 손상시킨 행위에 대해 면허정지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수의사법이 개정됐다.
품위를 손상시킨 수의사는 대한수의사회가 윤리위원회 심의·의결을 거쳐 농식품부장관에게 면허정지 처분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하는 권한(징계요구권)도 신설됐다.
이제껏 비윤리적 회원에 대한 수의사회 차원의 자정작용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20년간 자체 진행된 중앙회 징계절차는 2건에 그친다. 이번 수의사법 개정을 계기로 신뢰받는 전문직으로 나아가려면 보다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품위유지의무·징계요구권 법제화
수의사 집단의 신뢰·윤리, 전문직역 완성의 마지막 단계
취재 과정에서 여러 수의사를 만나다 보면 들리는 소문도 여럿이다. 동료 수의사조차 ‘왜 그런 검사까지 했는지 모르겠다’는 과잉진료, 보호자가 비도덕적으로 펫보험금을 타내는데 협조한 원장 등 유형도 다양하다.
물론 일방의 제보만으로는 사실관계를 완전히 파악해 잘잘못을 가릴 수 없다. 하지만 ‘설마 그러겠냐’ 싶은 정도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 것도 사실이다.
굳이 숨어 있는 사례를 찾지 않더라도 농장동물업계에서 동물약품판매업소와 결탁해 진료 없이 처방전을 발급하는 수의사가 있다면, 이들도 진료 윤리를 저버렸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전문직에게 요구되는 윤리를 저버리는 행위는 다양하다. 각각을 일일이 명시해 규율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의사, 변호사, 세무사 등 전문직종 관련 법률은 ‘품위’라는 폭넓은 표현을 활용한다.
전문직에게 품위유지의무를 부여하고 이를 어기면 자격정지나 박탈 처분을 내리도록 하되, 품위 손상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해당 전문가단체가 판단하도록 하는 형태다.
수의사법에도 비로소 품위유지의무가 신설됐다. 윤준병 의원이 2020년 대표발의한 수의사법 개정안이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품위유지의무를 위반한 수의사를 수의사회 윤리위원회가 심의·의결해 자격정지를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에도 임상수의학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진료를 하거나 과잉진료를 하는 등의 수의사에게는 자격정지를 요구하는 민원을 제기할 수 있었지만, 윤리위 등의 절차를 거친 수의사회의 공식 요구는 더 큰 무게감을 가진다.
면허정지 처분은 일시적이지만 수의사로서의 영리활동을 원천적으로 막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다. 그러한 면허정지 처분을 요구할 수 있게 된만큼 수의사회가 비윤리적 회원을 자정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셈이다.
서울대 수의인문사회학 천명선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도 수의사 전문직이 발전하면서 윤리적 자정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시기가 됐다고 진단했다.
천 교수는 “소비자와의 갈등 해결, 수의사 진료에 대한 신뢰, 집단의 윤리수준에 대한 문제는 전문직역 완성의 마지막 단계”라며 “윤리적 기준을 세워 맞춰나가려는 노력은 수의사라는 직업 자체가 존립하는데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비윤리적 행위를 한 회원을 감싸거나 관행이라며 넘어가면 결국 제3자가 수의사 집단을 규제하게 된다는 것이다.
윤리위 보단 자문위?
수의사회 자체 징계절차는 단 2건
농식품부 민원 자문도 연간 몇 건에 그쳐
기존에도 수의사회에 윤리위원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한수의사회는 연간 1~2회 윤리위를 개최했다. 대수가 윤리위를 개최할 때마다 2~3건을 심의했는데, 실상은 비윤리적 수의사의 징계여부를 검토한다기보단 농식품부가 요청한 민원에 대한 자문활동에 가까웠다.
지자체나 농식품부에 들어온 수의료분쟁 민원을 두고, 문제가 된 수의사의 행위가 임상수의학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지 혹은 과잉진료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안건이 대부분이었다. 가령 건삭 파열 환자에서 피모벤단을 처방해도 되는지, 백신 여러 종을 동시에 접종한 행위가 적절한지를 놓고 자문하는 식이다.
수의사법에 품위유지의무가 신설되기 전이긴 하지만, 품위손상 여부를 가린다기 보다는 수의료분쟁에 대한 감정 업무에 가깝다.
이마저도 2023년 1차 윤리위를 끝으로 중단된 상태다. 윤리위 개최 자체가 행정적으로 부담이 있다 보니 대수 사무처가 임원 자문 등을 거쳐 농식품부 요청에 회신하는 식으로 갈무리하고 있다.
수의사회가 자체적으로 진행한 회원 징계는 더 드물다. 최근 20년간 단 2건에 그친다. 그나마 최종적인 회원권 정지 징계로 귀결된 사례는 1건에 불과하다.
어차피 수의사에게 별다른 타격이 없는 수의사회 회원권 정지밖에 할 수 없었다는 한계가 있긴 하지만, 자정작용이 활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품위유지의무·징계요구권 신설이 효과를 발휘할 지는 수의사회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활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정부 민원 몇 건을 수동적으로 자문하는 것만으로는 이제까지와 별반 달라질 것도 없다.
수의사회, 전문성·윤리성 위배 회원 적극 대응
윤리위는 비윤리적 회원 징계로, 수의료분쟁은 감정·조정으로 ‘교통정리해야’
1차 대응기구 필요..의료계 전문가평가제 시범사업 눈길
우연철 대한수의사회 사무총장은 “수의사회가 봐도 반(反)수의사적인 행위임에도 법적근거가 미비해 대응하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라며 “윤리위원회 심의, 징계요구 등 절차적 기반을 마련한 것이 이번 수의사법 개정의 의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업용 쇠톱 사건처럼 수준 낮은 진료나 덤핑을 통한 소비자 현혹 등 수의사의 전문성·윤리성을 위배한 회원에 대해 적극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천명선 교수는 교통정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현재는 비윤리적 수의사의 문제, 수의료분쟁에 대한 전문 감정, 수의사-고객 간의 싸움 등이 민원창구에 뒤섞여 있는데 이를 각각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 지 기준을 세워 일차적으로 판단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천 교수는 지난해 대한수의사회 의뢰로 수행한 ‘진료 투명성 이슈와 동물의료 신뢰도 강화 연구’에서 동물의료 불만 조정기구 신설을 제안했다.
동물병원 고객 등이 불만을 접수하면 해당 기구가 사실관계 조사를 거쳐 윤리적 판단이 필요한 문제라면 대수 윤리위원회에 이관하고, 위법사항이 있으면 행정·형사처분 절차로 넘기고, 상호 분쟁이라면 조정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천 교수는 “수의사들이 현장에서 고객과의 갈등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만큼, 민원이 제기됐을 때 어떻게 처리될 지 마침표를 찍어줄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불법의료광고, 마약류 남용, 의료인 폭행 등 자율규제하는 의사회
이와 관련해 의료계는 2019년부터 지역별로 전문가평가제 시범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지역 의료현장을 잘 아는 의사가 동료의사의 품위손상이나 의료윤리 위배를 상호 모니터링하며 자율규제에 나서는 방식이다.
광역시도의사회에 설치된 전문가평가단이 품위손상의심사례 민원에 대한 조사를 벌인다. 필요시 복지부, 보건소와 공동조사를 진행한다.
조사결과에 따라 의사회 윤리위원회에 회부하거나, 사무장병원의 경우에는 직접 형사고발에 나서기도 한다.
서울시의사회가 최근 발간한 [서울특별시의사회 전문가평가제 시범사업 운영 백서]에 따르면, 서울시에서만 2019년부터 4년여간 72건을 전문가평가제 시범사업을 통해 처리했다.
여기에는 불법성형앱 광고, 의료인 폭행, 불법 본인부담금 면제 및 무면허의료행위 방조, 과도한 마약류 처방(비도덕적 의료행위) 등 다양한 문제가 포함됐다.
가령 수술기록·진단서 확인도 없이 매우 쉽게 펜타닐패치를 처방한 의사의 행위를 비도덕적 의료행위로 보고 서울시의사회 윤리위원회, 대한의사협회 중앙윤리위원회를 거쳐 행정처분을 의뢰했다.
이를 포함한 처리결과는 행정처분 의뢰 11건, 고발 1건, 주의 35건, 혐의없음 17건, 조사 중단 12건으로 집계됐다.
황규석 서울시의사회 전문가평가단장은 지난달 18일 열린 백서 발간 기자회견에서 “마약류 처방에 있어서는 법에서 다루지 못하는 윤리의 영역까지 전문가평가단이 더욱 엄격한 잣대로 관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명하 서울시의사회장은 “전문가평가단을 운영하면서 회원 간 문제에 대해 합리적으로 조정이 가능하고 국민들이 바로 접할 수 있는 방송·유튜브·성형앱 등의 불법적인 사항을 개선할 수 있었고, 비윤리적인 마약류 남용을 저지하는 등 많은 효과가 있었다”면서도 “보건소에 접수된 민원의 경우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자료를 제공받을 수 없어 조사를 진행할 수 없었고, 복지부가 자체 처분하거나 보건소에 이첩해 조사하는 등 시범사업 취지와 달리 평가단이 관여할 수 없는 사례도 있었다”고 지목했다.
징계요구권 7월부터 발효
처방전-약품판매 담합도 품위손상행위
품위유지의무와 징계요구권을 신설한 개정 수의사법은 오는 7월 24일 시행된다. 품위손상행위가 무엇인지는 추후 대통령령으로 구체화된다.
최근 입법예고된 수의사법 시행령 개정안에는 해당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의료법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
의료법 시행령은 품위손상행위로 ▲학문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진료행위 ▲비도덕적 진료행위 ▲거짓 또는 과대광고 ▲처방전 발급 환자를 특정 약국에 유치하기 위해 약국과 담합하는 행위 등을 규정하고 있다.
처방전 발급 환자를 특정 약국에 유치하기 위한 담합행위는 수의사로 치면 처방전 전문 수의사와 동물용의약품도매상 간의 결탁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다.
의료계의 전문가평가제 시범사업이 비단 의료법상 품위손상행위뿐만 아니라 사무장병원, 무면허의료행위(아이디 위임을 통한 처방 포함),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 의사회원간 폭력행위 등을 폭넓게 다룬 점도 주목할 만하다.
수의사회가 진료 현장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실질적인 자정작용에 나설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재량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