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 아닌데 진단·치료·예후판정·수술까지 허용하기로 한 美콜로라도주
수의사와 테크니션 사이 중간 직급 ‘Veterinary Professional Associate’ 신설안 통과
미국이 차기 대통령으로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를 선출한 지난주, 미국 수의계에서도 큰 변곡점이 찾아왔다.
콜로라도 주에서 수의사와 테크니션 사이의 중간 직급 ‘Veterinary Professional Associate(VPA)’를 신설하는 주민발의안 129호(Proposition 129)가 주민투표를 통과한 것이다.
수의사의 지도·감독을 전제했지만 VPA에게는 질병 진단, 예후 판정에 수술까지 허용된다. 미국수의사회와 콜로라도주수의사회, 미국동물병원협회 등 다수의 관련 단체가 반발했지만 주민발의안 통과를 막지 못했다.
VPA 신설을 지지한 쪽은 ASPCA 등 동물보호단체다. 코로나 이후 동물진료 수요가 폭증하며 수의사 진료 접근성이 떨어졌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수의사 부족하다며 만든 VPA
수의사와 테크니션 사이의 중간 직급
수의사 감독 받는다지만..진단, 치료계획 수립, 예후판정, 수술까지 허용
콜로라도주를 포함한 미국의 여러 주에는 주민발의제가 있다. 주의회를 거치지 않고 주민이 직접 법이나 조례를 발의하여 주민투표에 부칠 수 있다.
VPA 신설을 위한 콜로라도주 주민발의안 129호는 이번 대선과 함께 주민투표가 진행됐다. 11월 10일까지 개표가 94%까지 진행된 가운데 찬성률 52.7%로 통과가 확정적이다.
올초 발의된 주민발의안 129호는 “수의사 인력 부족으로 콜로라도주에 수의사 진료 접근성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 이는 반려동물의 복지를 위협하고 있다”면서 “중간급(Mid-level) 수의임상직역을 해결책으로 제안한다”고 밝혔다.
당장 수의사가 부족하니 수의사의 업무를 대신 맡을 수 있는 보조직을 새롭게 추가하겠다는 것이다. 그 보조직이 VPA다.
발의안에 따르면 VPA는 수의사 면허자의 감독 하에 동물 진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Associate(준회원)’이라는 명칭에서 떠올릴 수 있는 모습이다.
수의사 감독 하에 위임된 업무를 수행한다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VPA가 어떤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 명시하지는 않았다. ‘수의학 진료 표준에서 통상적으로 허용되는 수준의 행위를 할 수 있다’며 포괄적으로 규정했다.
이를 두고 현지에서는 VPA가 질병 진단, 예후 판정 심지어 중성화 수술 등 일부 수술까지 담당하게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상 수의사에 가깝다. 수의사가 지시한 검체 채취나 주사 등 술기 실무를 주로 담당하는 수의테크니션보다 훨씬 그렇다.
미국 연방법에 의해 수의사에게만으로 제한되어 있는 약품처방권을 제외하면, 수의사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됐던 동물진료권 대부분이 VPA에게까지 확대되는 셈이다.
VPA와 같이 수의사나 테크니션이 아닌 중간 직역을 제도적으로 신설한 것은 미국에서도 콜로라도주가 처음이다.
반대한 수의사회 ’역량 부실, 수의사 부족 문제도 해결 안 돼’
지지한 동물보호단체 ‘반려동물 치료 접근성 높일 것’
수의사단체는 VPA 신설에 반대했다. 미국수의사회(AVMA), 콜로라도주수의사회뿐만 아니라 미국동물병원협회(AAHA), 미국수의대생협회(SAVMA), 축종별 임상수의사 단체들과 미국켄넬클럽까지 반대 단체로 이름을 올렸다.
현지 수의사단체의 주로 비판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교육 부실이다. VPA에게 주어질 권한은 과도한 반면 VPA가 되기 위해 요구되는 교육 조건으로는 그럴 능력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이다.
발의안은 VPA의 교육조건으로 수의임상학 석사학위(master’s in veterinary clinical care)를 요구한다. 해당 석사과정은 콜로라도주립대 수의과대학에서 진행될 것으로 알려졌다. 3학기의 온라인 수업과 2학기의 임상실습이다. 4년 대학원 과정인 미국의 정규 수의학 교육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수의사회는 온라인 위주의 석사과정으로는 충분한 임상경험을 쌓을 수도 없고,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인증도 없으며, 해당 프로그램 졸업생의 역량을 판단하기 위한 시험도 없고, 해당 평가에 대한 자격요건도 없다고 비판했다. 그렇게 부실한 역량을 지닌 VPA가 배출되면 오히려 동물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의학적 재량권을 가진 VPA가 역량 부족으로 진료 사고 등을 일으킬 경우 지도감독 책임이 있는 수의사가 불이익을 볼 것이란 우려도 나왔다.
AVMA는 미국수의학이사회(AAVSB)가 수의사 및 수의테크니션 1만4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VPA와 같은 중간 직급을 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점을 지목했다.
콜로라도주의 수의사 출신 의원인 카렌 맥코믹은 AVMA와의 인터뷰에서 “(VPA가) 수의사 부족 문제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수의사 1명이 (VPA) 2~4명을 감독하면 수의사와 환자는 더 멀어지고 치료의 정확성은 희석된다”며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하고 어떻게든 사업비용을 낮출 방법을 찾으려는 대기업들만 혜택을 볼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동물보호단체는 발의안을 지지했다. 미국의 동물보호단체 ASPCA는 11월 8일 콜로라도주의 VPA 주민발의안 통과를 환영하며 “사람, 반려동물, 수의사를 위한 승리”라고 밝혔다.
VPA를 사람 의사를 보조하는 PA(Physician Assistant)와 유사하다면서 반려동물의 치료 접근성을 높이고, 기존 수의사의 업무 부담을 줄여줄 것이라 기대했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ASPCA와 미국수의사회가 각각 주축이 된 주민발의안 129호 찬반 진영은 각각 정치자금을 모금하며 홍보전을 벌였다. 결국 승리는 찬성 측으로 돌아갔다. ‘수의사가 부족하니 대체자를 만들겠다’는 단순한 논리가 콜로라도 주민들에게 더 설득력을 발휘한 셈이다.
VPA 신설하는 이번 주민발의안은 2026년 1월 1일부터 시행된다.
한국의 수의사 수급 연구, 여전히 진행형
공무원 등 일부 직역 부족 문제가 뇌관될까
미국수의사회에 따르면 현재 미국에서 신설을 준비 중인 수의과대학이 13곳에 달한다. 2030년대까지 연간 수의대 졸업생이 40%가 증가할 거란 전망까지 나온다. 그런데도 VPA라는 유사 수의사 직역까지 만들어졌다. 이처럼 여파는 엉뚱한 곳으로 튈 수 있다.
바다 건너 미국의 일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부산대 수의대 신설을 반대하며 엄동설한에 시위를 벌였던 때가 2년전이다.
당시에는 키를 쥔 농식품부가 ‘수의사 수급 연구가 먼저’라며 선을 그었다. 그 수급 연구는 지난해 진행됐다. 해당 연구결과는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았지만 ‘수의사 공급이 과잉’이라는 결론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올해 다시 한번 수의사 수급 연구용역이 마련됐다. 농식품부는 최근 한국직업능력연구원에 내년 1월까지 수의사 인력 수급 분석 모델 개발을 의뢰했다.
특히 전반적인 수급 전망과 별개로 수의직 공무원 등 일부 직역의 부족 문제가 어떤 영향을 미칠 지도 우려된다. 비(非)수의사 가축방역관, 비수의사 검역관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거론할 정도다. 필수의료로 일컫는 일부 진료과목이나 지방에 의사 공급이 부족하다며 의대정원 전체를 늘려버린 모습을 보고 있자면 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