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예찬의 Good Vet Happy Vet⑨] 전문직과 프로페셔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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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는 전문직이다.

노동시장에서 전문직은 특수한 위치에 있고, 상당한 특권이 주어진다. 전문직은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당 분야의 깊은 지식과 숙련된 기술, 통찰력과 응용력이 필요하므로 특수한 수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들이 종사하는 분야는 정의, 진리, 건강, 생명과 같은 사회를 지탱하는 초월적 가치에 헌신하기 때문에 독립적으로 그 가치에 봉사하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에 반박의 여지가 없게끔 한다.

사회는 전문직에게 해당 분야를 독점할 수 있는 독점권을 부여한다. 이를 위해 해당 직군의 영역을 법으로 보호하고, 능력을 입증한 자에게 면허를 발급해 행위자를 제한하며, 수요에 따라 공급을 조절하여 일정 수입이 보장되도록 한다. 이들 직군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권리이자, 사회의 이익을 위해 ‘성실한 직무 이행’이라는 조건이 달린 의무이다. 이 때문에 전문직과 사회는 계약관계(Professional-Social Contract)에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계약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바로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이라는 용어는 앞선 글에서 몇 차례 등장한 적 있다. ‘전문직업성’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는 앞으로 수의계에서 비중 있게 다뤄져야 할 중요한 화두이다.

전문직 연구의 선구자인 엘리엇 프라이드슨(Eliot Freidson)은 프로페셔널리즘을 “직업의 구성원이 자신의 노동을 스스로 통제하는 동시에 삶을 영위하게끔 허용하는 일련의 제도”라고 설명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대중이 수의사를 신뢰하게 하고, 수의사가 그 직업적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가치관, 행동, 소양, 권익추구, 책임 등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수의학교육(Veterinary Education) 전문가들은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하여 단순히 추상적인 직업적 예절이나 지향점이 아닌 실천적이고 규범적인 성격이라고 말한다. 프로페셔널리즘은 근무 매뉴얼에 쓰인 대로 행동하는 것 같은 피상적인 옵션이 아니라, 직업의 의무 이행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되는 필수적인 것이며 또 실제로 효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의사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한 연구는 국제적으로도 201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정도로 비교적 최근에 논의되고 있는 분야이다. 그래서 의료 프로페셔널리즘에 관한 연구를 참고할 수 있는데, 그중 프로페셔널리즘을 어떻게 개념화할 것인가에 대해 연구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캠프(Van De Camp)와 그의 연구진은 프로페셔널리즘을 대인관계적, 공적, 내적 프로페셔널리즘의 세 영역으로 구분하고, 각각을 구성하는 키워드와 그 키워드가 문헌에 인용된 횟수를 조사하였다. 다음은 각 프로페셔널리즘의 영역에 속하는 키워드의 일부이다.

대인관계적 프로페셔널리즘(Interpersonal Professionalism)

이타주의(Altruism) 존중(Respect) 성실(Integrity) 정직(Honesty) 연민(Compassion)

봉사(Service) 책임감(Responsibility) 신의(Honor) 신뢰성(Reliability, Trust)

대인관계기술(Interpersonal skills) 의사소통기술(Communication skills)

자기이익주구 중지(Suspension of self-interest) 리더쉽(Leadership) 돌봄(Caring)

동료/팀과의 관계(Relationships with colleagues/team), 환자교육(Educate patients) 등

 

공적 프로페셔널리즘(Public Professionalism)

책무감(Accountability) 윤리강령을 따름(Submission to an ethical code)

탁월함(Excellence) 자기규제(Self-regulation) 의무(Duty)

높은 수준의 전문성(High level of expertize) 사회적 계약(Social contract)

전문가적 행동(Professional conduct)

전문가 책임 수행(Carry out professional responsibilities)

정의(Justice) 역량(Competence) 전문가적 권위(Expert authority)

해박한 지식(Be knowledgeable) 비밀 보호(Protect confidential information)

지역사회 복지 향상(Enhancing welfare of the community)

생명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믿음(Faith in life’s meaning and value)

전문가 협회의 자율성(Autonomy of professional associations)

표준을 위한 투쟁과 보장(Fight for and guarantee standards) 등

 

내적 프로페셔널리즘(Intrapersonal Professionalism)

평생학습(Lifelong learning) 도덕성(Morality) 겸손(Humility) 성숙(Maturity)

본질적인 의업의 가치(Value medical work intrinsically)

덕(Virtue) 훌륭한 임상적 판단(Good clinical judgement)

자기 역량의 한계 알기(Know limits of professional competence)

스트레스에 대한 대응(Response to stress) 자기향상(Self-improvement)

문학과 예술 감상(Appreciate literature and arts) 비판적 분석(Critical analysis)

높은 불확실성 다루기 (Deal with high levels of uncertainty) 등

 

이처럼 프로페셔널리즘의 범위는 매우 넓고 다양한 키워드를 포함한다. 상당수의 키워드는 이전 칼럼에서 언급된 적이 있다. 언뜻 보기에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이 키워드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모두 ‘적절한 직무수행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수의사의 프로페셔널리즘은 수의학의 특성이 반영되어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위의 키워드와 상당히 공통분모가 많을 것이다. 이 중 앞선 글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키워드 몇 개를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 평생학습

우리가 입고 있는 가운의 이름 앞에 새겨진 ‘D.V.M.’의 D는 ‘Doctor’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학사 졸업자에게 ‘Bachelor’ 학위를 수여하며, 수의학처럼 Doctor를 수여하는 학문 분야는 몇 되지 않는다. 다른 학문에서는 박사학위(Ph.D.)를 가지면 Doctor 호칭을 쓰고 있다.

Doctor는 본디 ‘가르치는 자’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기원한 단어로, 대학에서 해당 분야를 강의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에게 수여되는 호칭이었다. 오늘날 Doctor라는 단어는 학술학위라기보다는 특정 직군에서 쓰이는 호칭으로 사용되지만, 그 단어의 기원을 생각하면 우리는 DVM이라는 학위에 대한 무게감을 느껴야 한다.

정보 접근성의 향상은 전문직의 입지를 더는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전공 서적이 아니면 접근할 수 없었던 정보들이 이제는 검색창에 키워드만 입력하면 번역까지 되어 나온다. 수의학은 그 어떤 학문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학문 중 하나이고, 사회와 소비자들의 기대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인터넷에 5분만 투자하면 얻을 수 있는 정보를 가진 사람을 누가 전문가로 인정하겠는가?

수의사는 평생 공부해야 하는 직업이다. 스스로 발전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아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압도적이고 깊이 있는 지식, 숙련된 기술과 경험에서 비롯한 통찰력이 없다면 무엇보다 스스로 수의사로서 경쟁력을 잃을 것이다.

스트레스에 대한 대응 / 문학과 예술 감상

영국에서 이루어진 연구결과에 따르면 수의사의 자살률은 다른 의료관계 직종의 약 2배, 일반 인구 자살률의 약 4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의사가 스트레스를 받아 자살에까지 이르는 요인은 다양하겠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수의사가 스트레스에 취약한 것은 사실이라 볼 수 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복지 추구와 스트레스 관리의 필요성은 유럽연합, 영국, 캐나다 수의사 윤리강령에서 전문직(profession)에 대한 의무의 일환으로 명시되어 있다. 스트레스 상태에서는 높은 질의 서비스 제공과 적절한 직무수행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 감상’은 이와 연관된 키워드인데, 이것이 프로페셔널리즘에 포함되는 이유는 이 스트레스를 조금은 ‘건전하고 고상하게’ 풀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의 공리주의를 주창한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은 단순히 쾌락의 양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 이론을 이어받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쾌락에도 질적 차이가 존재함을 인정하며 정신적·감정적 가치를 강조한 질적 공리주의로 발전시켰다. 그는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유명한 말로 대표된다.

물론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날마다 술독에 빠지는 것보다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질적인 공리주의가 추구하는, 더 나은 ‘선(善)’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허세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인류는 본능적으로 고상한 가치를 추구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맥락에서는 ‘품위 유지’가 있다. 공무원 행동강령을 보면, 공무원은 품위를 지켜야 하며 ‘축소(절제)된 사생활의 원칙’이 적용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근거로 국민의 기대감과 공무원의 상징성을 언급한다. 수의사도 마찬가지다. 개인이 어떠한 집단을 상징하는 성격을 가졌을 때는, 최소한 그 기대감에 반하지 않을 정도의 품위는 유지할 필요가 있다.

앞선 글에서 다뤘던 모든 문제는 결국 프로페셔널리즘의 부재에서 기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간 발생했던 수의사의 윤리적 문제에 우리가 다급하게 찾았던 것 역시 프로페셔널리즘이었다. 엘리엇 프라이드슨은 프로페셔널리즘을 전문직의 ‘영혼’에 비유했다. 이 칼럼의 시작부터 이야기하고 있는 ‘좋은 수의사’는 곧 ‘프로페셔널리즘에 충실한 수의사’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프로페셔널리즘이 없는 수의사’라는 말은 애초에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참고자료

– 전우택, 김상현, 오승민. 인문사회의학, 돌베게, 2011.

– 엘리엇 프라이드슨, 박호진(역). 프로페셔널리즘 : 전문직에 대한 사회학적 분석과 전망, 아카넷, 2007.

MAY, Stephen A. Veterinary ethics, professionalism and society. Veterinary and Animal Ethics, 2013, 44-58.

MOSSOP, Liz H. Is it time to define veterinary professionalism?. Journal of veterinary medical education, 2012, 39.1: 93-100.

VAN DE CAMP, Kalinka, et al. How to conceptualize professionalism: a qualitative study. Medical teacher, 2004, 26.8: 696-702.

국민권익위원회, 2018 공무원행동강령 업무편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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