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병원에서 사라진 향정신성 식욕억제제
최근 5년간 동물병원에 납품된 펜터민 성분 식욕억제제 85%가 행방 묘연
동물병원에서 마약류 식욕억제제와 프로포폴이 사용되지 않고 사라진 정황이 드러났다. 사람에서의 오남용 우려가 있는 성분인만큼 관리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국회의원(사진, 서울 영등포갑)은 일명 ‘나비약’으로 불리는 향정신성 식욕억제제와 프로포폴이 일부 동물병원에서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다고 12일 밝혔다.
김영주 의원실은 식품의약품안전처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최근 5년간 전국 동물병원 마약류 납품 및 처방현황을 받아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마약류 식욕억제제를 납품받은 동물병원은 총 7곳이다. 펜키니정, 디에타민정 등 펜터민 성분(phentermine) 향정신성의약품 828정이 납품됐다.
김영주 의원실이 이들 동물병원을 추적 조사한 결과 708정(85.5%)의 행방이 묘연했다. 해당 식욕억제제를 납품받은 동물병원 7곳 중 4곳은 사용기한이 임박했거나 경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처방하지 않았다.
경북 소재 A동물병원은 2018년부터 2019년까지 총 300정의 식욕억제제를 납품받았지만, 이후 폐업하면서 이들 식욕억제제는 사라졌다. 처방기록도 남아있지 않았다.
A동물병원에서 납품받았지만 처방기록이 없이 사라진 마약류에는 식욕억제제뿐만 아니라 프로포폴도 포함됐다.
김영주 의원실은 “A동물병원은 폐업 후 김천에 B동물병원을 개원했는데, 해당 원장은 A병원을 폐업하면서 사라진 마약류 소재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해당 원장은 새로 개원한 B동물병원에서도 2019년부터 2020년까지 식욕억제제, 프로포폴을 포함한 마약류 7종 3,420개를 납품받았지만, 처방한 기록이 없어 현재 식약처가 조사 중이다.
2019년은 이미 마약류통합관리시스템(NIMS) 사용이 의무화된 이후다. 마약류를 사용했다면 NIMS에 처방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이를 어길 경우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특히 환축에 처방해 원외에서 투약하는 마약류의 경우에는 동물 소유자의 주민등록번호까지 보고해야 한다.
동물병원을 폐업하는 경우에도 보유하고 있던 마약류는 관할 보건소를 통해 폐기한 후 해당 사항을 보고해야 한다.
강북 소재 D동물병원은 2021년 식욕억제제 28정을 납품받았지만, 해당 병원이 폐업하면서 납품받은 식욕억제제도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다. 납품기록만 있고 처방내역은 없다. 식약처는 인천 소재 G동물병원이 납품받은 식욕억제제 180정의 소재도 파악하고 있다.
이 밖에도 H동물병원은 2019년 식욕억제제 벨빅정 180정을 납품받아 13정을 처방하고 나머지 167정을 반품했지만, 해당 반품내역을 신고하지 않아 행정처분 대상으로 분류됐다.
벨빅정은 펜터민이 아닌 로카세린(lorcaserin) 성분으로 2020년 미국 FDA에서 퇴출된 약물이다. 국내에서도 판매가 중지됐다.
“개 비만치료에 펜터민? 처음 들어봐요”
비만은 반려동물에서도 여러 만성질병의 위험을 높이는 질환이지만, 마약류 식욕억제제를 처방하는 경우는 일반적이지 않다. 사료급여를 일부 제한하거나, 체중감량용으로 만들어진 처방식을 활용하는 것이 보통이다.
복수의 수의과대학 내과 교수진, 수의행동의학 전문가 등에게 확인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펜터민 성분의 약물을 비만견 치료에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승인받은 비만견용 치료제(조에티스社 Slentrol™)가 있긴 하지만, 해당 약품의 성분은 펜터민이 아닌 dirlotapide다.
김영주 의원은 “사람이 복용하는 마약성 식욕억제제를 동물병원에서 납품을 받아 처방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해당 동물병원들에 대한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조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용기한이 임박·경과했거나 동물병원 폐업으로 사라진 식욕억제제들은 그간 식약처의 부실한 마약류 관리감독 체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루 빨리 조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식약처는 “올바른 처방인지 여부 등에 대하여는 해당 동물의 질병 상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면서 3개 동물병원은 수사를 의뢰하고 나머지 병원에는 행정처분 및 과태료를 부과할 방침이다.
2022년 기준 사람의 펜터민 성분 식욕억제제의 처방량은 8천만개가 넘는다. 동물병원으로의 납품량은 그에 비하면 0.001% 수준에 그친다.
그렇다고 마약류 의약품의 관리부실이 정당화될 수 없다. 마약류관리법 위반으로 행정처분을 받은 수의사는 2018년 15건에서 2020년 78건으로 늘었다. 관리부실이 이어지면 동물병원에 대한 규제도 더 강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