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시, 아프리카돼지열병 백서 출간..문제점과 개선방안은
방역업무 과로로 유명 달리한 故 정승재 주무관 수기도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진행 상황을 묻는 전화가 왔다. 때에 따라서는 짜증도 났다. 예전 구제역 때의 가장 큰 폐단 중 하나인 보고문화가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다. 밥은 고사하고 거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잠도 오지 않아 쪽잠으로 밤을 세웠다. 그 와중에도 여기서 상황보고, 저기서 상황보고… 각종 보고들이 끊이지 않았다.
여건상 집이 먼 이유도 있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자기 일인냥 같이 움직이는데 집에 갈 생각을 못했다. 나중 얘기지만 한 달 만에 집에 갔다 온 것 같다.”
“의심신고가 들어오는 날이면 마치 내가 시험대에 올라있는 것처럼 떨리고 잠도 오지 않았다. 씻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새벽을 뜬잠으로 설치다 겨우 아침에 눈을 뜬 뒤 그저 주변에서 “먹자”하면 그게 아침이고, 방금 먹었나 싶었는데 점심이고, 정말 허기질 때 어둑해지면 저녁이었다. 점차 시간개념이 없어졌다”
故 정승재 주무관 – 파주ASF백서 담당자 수기에서 발췌
파주시가 2019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대응과 극복 경험을 담은 ‘파주ASF백서’를 1일 공개했다.
300여 페이지 분량의 백서에는 연다산동 최초발생농가로부터 의심신고가 접수된 9월 16일부터 파주시 사육돼지 전두수에 대한 선수매 후살처분 조치가 완료된 10월 19일까지 약 한 달 간의 사투가 담겼다.
살처분, 수매, 통제초소 운영을 포함한 대응체계부터 대응 과정 중에 초래된 논란과 극복노력, 향후 개선방안을 망라했다.
최종환 파주시장을 비롯한 공직자와 자원봉사자, 피해농가들의 인터뷰도 실렸다. 과중한 방역업무로 인한 과로가 이어지다 지난 3월 쓰러져 유명을 달리한 故 정승재 수의사의 수기도 눈길을 끌었다.
국내 ASF 발생농가 14개소 중 5개소가 파주시에 위치하고 있다. 당시 파주시에서 사육되고 있던 돼지 125,878두가 수매·살처분됐고 아직까지 재입식이 이뤄지지 않았다.
파주시는 살처분·통제초소 등 방역비용과 살처분 보상금을 포함한 직접적인 경제손실 규모를 812억원으로 추산했다.
매뉴얼 없어 살처분 용역 부실계약 우려..보여주기식 생석회 살포는 이제 그만
백서는 파주시의 가축전염병 전담조직이 가축사육규모에 비해 숫자와 전문성에서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779농가에서 226만 마리의 가축을 키우는데 반해 농축산과 가축방역팀은 6명에 불과하다(공중방역수의사 포함 수의사 3명).
백서는 “전담조직의 부실은 초기대응 국면인 의심신고 접수 이후의 컨트롤타워 역할 미흡으로 이어진다. 방역 기자재 공급, 살처분 용역계약 등 긴급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관련 협력체계 시동에 지연을 일으키기도 한다”며 축산·동물보호 관련 업무에서 벗어난 가축방역 전담조직으로 재편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살처분 용역의 부실계약도 문제로 지적됐다. 표준 매뉴얼이 없는 상태에서 시간에 쫓기다 보니 용역업체가 터무니없는 비용을 청구하거나 용역업체의 투입 인력·자재 등 현황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백서는 “현장 여건에 따라 다르지만 돼지 2천두 살처분 시 3억원 내외의 용역비가 하루 만에 투입된다”며 향후 살처분 규모별로 차등을 둔 살처분 기준금액을 미리 만들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공공차원의 이동식 렌더링 확보 필요성도 거론됐다. 경기지역에 렌더링 시설이 연천과 포천에 2개소뿐이라 하루 돼지 처리량이 4~6천두에 불과하다 보니, 대부분의 살처분이 FRP 매몰방식으로 진행됐다는 것이다.
방역초소에서 기계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생석회 살포 문제도 지목됐다.
생석회는 물에 닿을 때 발생하는 열과 강알칼리성 작용으로 소독효과를 보일 수 있지만, 물과 만나지 않으면 별 소용이 없다. 또한 물과 닿으면 쉽게 굳기 때문에 차량소독을 실시할 때마다 물을 뿌린 후 다시 생석회를 살포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백서는 “이번 ASF에도 생석회가 공급됐지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물과 희석되어 액상으로 변하거나 굳어져 버렸다”며 “이제는 보여주기 위한 방역보다 적재적소에 맞는 방역이 필요한 시대”라고 꼬집었다.
백서는 “축사와 거점소독시설, 농장 출입구에서는 반드시 (생석회가 아닌) 소독제를 사용하고, 생석회가 만능 소독재로 둔갑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최종환 파주시장은 “백서를 통해 드러낸 방역 행정에 대한 면밀한 고찰로 변화와 개선을 꾀해야 한다”며 “우리 모두에게 아픔을 주었던 故 정승재 주무관의 헌신과 수고를 결코 잊지 않고 발전하는 계기로 만들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