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km 겹겹이 설치한 광역울타리, 철거·개방 요구 커졌다

이미 멧돼지 ASF는 울타리 넘어 남하했는데..애꿎은 멸종위기 산양 폐사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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멧돼지 아프리카돼지열병(ASF)의 남하를 막기 위해 설치됐던 울타리를 이제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멧돼지뿐만 아니라 여러 야생동물의 이동을 단절시키면서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문제가 지적되어 왔는데, 지난 겨울 멸종위기에 놓인 천연기념물 산양이 대규모로 폐사하면서 울타리 철거 문제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이미 멧돼지 ASF가 경북 영천까지 남하한 만큼 산양의 주요 서식지인 설악산이나 DMZ 인근의 울타리를 존치해야 할 필요성이 사라졌다는 지적도 함께 나왔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올해 광역울타리 일부 구간에서 부분개방을 시험하고 있다. 해당 효과를 분석해 내년에 울타리 관리 로드맵을 수립한다는 계획이지만, 환경단체에서는 산양 집단폐사가 올 겨울 다시 반복될 수 있다며 산양 주요 서식지 인근에서라도 철거를 서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더불어민주당 김주영, 이기헌, 임호선 의원은 3일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아프리카돼지열병 방역 관리실태 진단 및 야생동물 피해대책 방안 마련 토론회를 개최했다. 오연수 강원대 교수와 김산하 생명다양성재단 대표가 발제에 나섰다.

광역울타리가 처음 설치된 것은 2019년 11월이다. 당해 경기·강원 접경지역에서 처음 확인된 ASF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서다. 동서로 가로지는 거대한 울타리를 쳤지만 멧돼지 ASF 남하를 막지는 못했다. 방역당국은 남하를 ‘지연’시키는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하고 있다.

멧돼지 ASF가 점차 남하하면서 광역울타리는 5차례 걸쳐 반복됐다. 광역울타리로만 1,831km에 달한다. 낙석방지망 등 대체시설물을 제외해도 1,600km에 이른다.

여기에 ASF 발생지 인근에 1·2차에 걸쳐 설치되는 울타리, 농가밀집단지로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울타리까지 더하면 그 길이는 3,000km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된다. 설치에만 1,700억원이 넘는 예산이 투입됐다.

김산하 대표는 “국토의 둘레길이가 4,500km인 점을 감안하면 매우 긴 거리”라며 “너무 다양한 울타리가 겹겹이 혼재되어 있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멧돼지 ASF는 현재 경북 영천까지 도달했다. 사람에 의한 기계적 전파로 추정되는 부산 사례를 제외해도 이미 마지막 광역울타리를 넘은 지 오래다. 환경부는 2022년 5월 경북 상주-영덕 구간을 마지막으로 추가적인 광역울타리 설치를 중단한 상태다.

이처럼 남하를 지연시키는 용도라면 적어도 초반에 설치된 광역울타리의 효용은 다한 셈이다. 애초에 광역울타리 설치 당시부터 야생동물 피해나 주민 통행 불편, 경관 저해 같은 부작용 문제가 지적됐다.

철거·개방 논의가 본격화될만했던 셈인데, 지난 겨울 산양이 대량으로 폐사하면서 방아쇠를 당겼다.

(@김산하,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ASF 방역대응 고찰 발표자료)

멸종위기종인 산양은 천연기념물이다.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의 북한 접경지역, 한반도에만 서식하는 동물이다.

산양의 멸실은 통상 연간 100마리 미만에 머물렀지만, 지난 겨울 갑자기 폐사가 늘었다. 올해 들어 7월까지 보고된 멸실 수치는 1,020마리다. 멸종위기종이 갑자기 10배 이상 폐사한 셈이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폐사원인이 집계된 개체의 90% 이상이 탈진과 기아로 인한 폐사로 추정됐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전년대비 4배 늘어난 폭설과 역대급 한파로 인한 먹이 동결과 함께 울타리도 원인으로 지목됐다. 울타리가 막고 있으니 먹이를 찾아 이동하기 어렵고, 실제로 산양 폐사체들이 울타리를 따라 발견되는 경향도 관찰됐다는 것이다.

설악산 국립공원의 산양 폐사가 대표적이다. 이기헌 의원실이 국가유산청과 환경부로 받은 자료를 시민단체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의모임(국시모), YTN데이터랩 등이 분석한 결과 상당수의 폐사 발견지점이 울타리를 따라 분포하는 양상을 보였다.

YTN데이터랩에 따르면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발견된 산양 폐사체의 절반가량이 ASF 차단울타리의 영향권 내에 위치했다.

김산하 대표는 “현재 분석 중이지만 ASF 울타리와 산양 폐사의 관계성은 뚜렷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현 시점에서는 고밀도로 설치된 울타리를 생태학적으로 부정적인 여파를 감수하면서 존속시켜야 할 이유는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토론자로 나선 고은경 한국일보 동물복지 전문기자와 정인철 국시모 사무국장은 오는 겨울 산양 떼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전향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다시 겨울이 도래하기 전에 주요 산양서식지 인근의 울타리라도 선제적으로 철거하거나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토론의 좌장을 맡은 박영철 교수도 “설악산 등 산양 폐사가 많았던 구간의 울타리에 부분개방 테스트 베드를 전향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환경부는 지난 4월 야생멧돼지 ASF 관리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2025년까지 울타리 운영 관리 로드맵을 수립한다. 이를 위해 부분개방 시범사업을 벌이고 울타리 설치에 대한 효과를 분석하는 연구용역을 진행하고 있다.

환경부 야생동물질병관리팀 정윤환 과장은 “강원지역 21개 지점의 울타리를 일부 개방해(지점당 4m) 무인센서카메라로 촬영한 결과 산양, 멧돼지 등이 이동하는 것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시범 부분개방 지점은 국립공원과 산양서식지 위주로 ASF가 발생하지 않고 양돈농가로부터 거리가 있는 곳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로드맵을 수립하기 전인 이번 겨울 이전에 울타리를 철거·개방해야 한다는 요구에 대해서는 “부분개방 시범사업 모니터링을 좀더 확대할 지 여부는 검토하고 있다. 철거는 아니다”면서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향후 울타리를 철거·개방하더라도 전면 철거보다는 지역별 필요성에 따라 달리 봐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호성 전북대 교수는 “남하 저지 역할을 다한 울타리는 개방도 가능하겠지만, 주변 양돈장의 위험을 막아줄 정도는 유지되어야 한다”고 지목했다.

ASF처럼 야생동물과 가축 모두에 영향을 미치는 질병에 대한 대응을 효율화하려면 그에 맞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조언도 덧붙였다.

조 교수는 “앞으로는 야생동물과 가축을 함께 관리해야 할 질병 문제가 더 커질 것이다. 이에 대한 대응속도를 높이려면 효율적인 기구가 필요하다”면서 “유럽에는 환경·농림을 함께 담당하는 부서를 보유한 국가도 있다. 수의계에서 동물청, 수의방역청 등을 제안하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3,000km 겹겹이 설치한 광역울타리, 철거·개방 요구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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