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칼럼] 박종무의 생명 이야기② – 가축전염병에 의한 반생명적 살처분 정책은 지속돼야 하나(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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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에 대한 이해
현행 가축전염병예방법은 몇몇 전염병을 국정 전염병으로 지정하여 국가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가축에 전염성 질병이 발생하거나 퍼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축산업 발전과 공중위생 향상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한 전염병을 방치하는 경우에 국가적인 손실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정말로 가축의 전염병이 국가적인 손실을 가져오는 질병인가?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전염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염병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수의학을 배우면서 다양한 가축의 전염병을 배운다. 그러면서 동물에게 전염병은 원래 있었던 것으로 받아들인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가축’에게는 치명적인 전염병이 있지만 ‘동물’에게는 치명적인 전염병은 없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생명은 바이러스나 세균을 포함하여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 적응하여 진화를 했기 때문에 질병이나 전염병과 같은 것은 없었다. 더더욱 치명적인 전염병과 같은 것은 생명의 역사에서 없었다. 생명은 바이러스를 포함한 환경에 적응해서 진화했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봐도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생명의 목적은 종의 생식과 번식에 있듯이 바이러스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방식이 다를 뿐이다. 바이러스는 어떤 생명에 감염된 후 복제하여 확산된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가 감기다. 감기도 원인이 influenza virus다. 바이러스는 어느 숙주에 감염된 후 자기 복제를 하고 또 다른 개체로 확산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숙주를 죽이게 되면 다른 개체로 퍼져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바이러스는 숙주를 죽일 만큼 치명적이지 않다. 숙주가 죽어버리면 다른 개체에게 퍼져나갈 기회도 없이 자기 또한 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바이러스들 중에 숙주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있는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동물은 바이러스가 있는 환경에서 진화를 해왔기 때문에 바이러스의 존재에 의해 치명적인 상태로 되지 않는다. 바이러스가 있는 상태에서 동적평형을 이루면서 건강하게 살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치명적이 되었다는 것은 어떤 원인으로 인해 그 동적평형 상태가 깨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바이러스가 치명적인 형태로 변이한 것이다. 자연의 상태에서 바이러스는 숙주를 죽이는 경우 자신도 더 이상 퍼져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숙주를 죽이지 않는다. 만약 숙주를 죽인다면 거기에서 바이러스의 확산은 종결되기 때문에 다른 숙주에게 전염되지도 않는다. 전염병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자연 상태에서 바이러스는 숙주에서 복제를 하며 숙주를 죽이지 않고 숙주가 바이러스를 확산시키고 다니도록 한다. 그것이 바이러스에게 이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었다. 바뀐 환경이란 인구가 밀집한 도시라는 환경이고 공장식 축산 환경이다. 그래서 인류의 전염병의 발생은 도시 발달의 역사와 괘를 같이 한다. 동물에서의 전염병 발생은 인간이 동물을 가축화하여 집단으로 사육하면서 발생하였다. 또 사육 환경이 바뀌면서 가축전염병은 점차 강력해졌다. 그 정점이 오늘날 과도하게 밀집하여 사육하는 공장식 축산이다.
이러한 환경은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굳이 숙주가 돌아다니며 다른 숙주에게 옮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아도 충분히 옮겨 갈 숙주가 많게 만든다. 이때 바이러스는 이미 감염된 숙주를 배려할 필요가 없다. 바이러스는 짧은 시간에 급속도로 복제하여 다른 개체에게 전이되는 것이 더 이익이다. 바이러스는 숙주가 굳이 다른 숙주를 만나기 위한 시간을 줄 필요가 없는 환경이 되면 치명적인 형태로 변이된다.
둘째는 바이러스에 대항하는 숙주의 면역력이다. 오늘날 공장식 축산에서 사육되는 가금류는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는 좁은 공간에 갇혀서 사육되고 있다. 죽을 때까지 자연광을 한 번도 쬐지 못한다. 죽을 때까지 흙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땅 속의 지렁이를 맛보지도 못한다. 수십만 마리가 배설한 배설물에서 발생한 지독한 암모니아가 뒤섞인 공기를 마시면서 산다. 이러한 환경에서 자란 가금류는 약한 바이러스조차 이겨낼 면역력이 없다.
따라서 가축의 전염병은 자연적인 질병이 아니라 인위적인 축산환경이 가져온 질병인 것이다.
살처분에 대한 윤리적 문제
우리는 AI가 발생했을 때 고병원성을 거론하고 광범위하게 살처분하기 때문에 아주 무서운 질병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위험성이 과장된 것이다. AI는 Avain Influenza다. 우리말로 하면 조류 독감이다. 우리가 흔히 걸리는 감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Influenza virus에 의한 감기가 위험한 질병인가? 아니다. 그런데 왜 AI에 감염된 가금류와 3km 근방에 있는 가금류는 모두 살처분하는가? 우리는 고병원성으로 인해 가금류에 AI에 감염되면 축산농가에게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에 살처분한다고 지례 짐작을 한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가? AI에 감염된 가금류는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 물론 죽음에 이르는 가금류도 있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는 가금류는 왜 죽음에 이르게 되는가? AI의 원인 바이러스가 너무나 지독하기 때문인가?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AI의 원인 바이러스가 너무 지독해서가 아니라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공장식 축산 형태로 가금류를 사육함으로 인해 가금류가 면역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원인은 고병원성 바이러스가 아니라 반생명적인 공장식 축산에 있다. 그러한데 열악한 환경은 그만 두고 원인을 바이러스로 환원시키고 있다.
또한 공장식 축산에서 사육되면서 면역력이 약해진 가금류라고 하더라도, AI에 감염되었다고 모두 폐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왜 국가는 모든 가금류를 살처분하는가?
그것은 축산농가의 이익과 관련된 부분 때문이다. 오늘날 공장식 축산에서 동물은 철저히 더 많은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자연 상태에서 닭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닭의 자연수명은 20~30년이다. 모든 생명체가 그러하듯이 닭 또한 어릴 때 부쩍 자라고 그 시기를 지나면 더 이상 자라지 않으며 개체의 신진대사를 위하여 영양소를 소모한다.
그래서 축산업계는 사료 효율적인 면에서 가장 이윤이 최대인 때를 계산한다. 1950년대 닭은 70일 간을 키웠다. 하지만 2008년경에는 48일만 키웠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더 짧아져서 35일 정도를 키운다. 그 이상은 급여되는 사료에 비해 비육율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빨리 자라는 동안만 사육하고 최대한 빨리 순환을 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축산업자에게 최대의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금류가 AI에 감염되는 경우 폐사가 문제가 아니라 병치레를 하느라고 성장 속도가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는 축산업자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축산업자들은 병에 걸린 가금류가 회복하는 동안을 기다려줄 마음이 없다. 하루하루가 수익과 연관되기 때문이고 가금류가 AI로부터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수익률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더 많은 수익을 얻으려는 축산업자들은 가차없이 걸림돌은 뽑아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손실은 국가가 정책적으로 보존하도록 만든다. 이번 AI와 관련하여 국가는 살처분 농가에는 419억원의 보상금을, 계열 업체에는 609억원을 배정하였다. 이 돈은 물론 국민의 세금에서 나오는 돈이다.
반려동물병원을 하는 수의사들은 이 이야기가 감이 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럼 반려동물병원에서 겪게 되는 예를 들어보겠다.
동물병원을 하다 보면 보호자들이 애견센터에서 강아지를 구입해 온다. 그 중에 구입 후 3~4일 되었을 때 구토를 하고 설사를 하는 강아지들이 있다. 이 강아지들을 파보바이러스 검사를 해보면 많은 경우 파보바이러스 양성 반응이 나온다. 보호자들은 병든 강아지를 구했다며 판매자에게 전화를 하고 판매자들 중에는 ‘자기네 책임이 아니니 배 째’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네가 치료해준다고 데려오라고 한다.
이 강아지들은 어떻게 되는가. 면역력이 약한 어린 강아지가 파보바이러스성 장염에 걸렸을 때 회복되는 것은 쉽지 않다. 회복을 위해서는 집중적인 치료가 필수적이다. 그럼 판매자들은 강아지를 집중적으로 치료하는가? 아니다. 장염에 걸린 강아지를 돌려받으면 살아있는 강아지를 신문에 돌돌 말아서 냉장고에 넣는 판매업자도 있다. 많은 경우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두고서 항생제를 주사하는 정도다. 살 강아지는 살고 죽을 강아지는 죽는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비용을 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금전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도 파보 바이러스성 장염에 걸린 강아지들이 치료를 해도 죽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안다. 그런 강아지를 치료하는 경우 죽었을 때 그 치료비는 그냥 낭비한 것이 된다. 그리고 구입자에게는 새 강아지를 주어야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될 것이라면 치료비를 낭비하지 않고 새 강아지를 구입자에게 주는 것이 그들에게는 최대의 이익인 것이다.
오늘날 축산업자들도 마찬가지다. 병에 들어 시름시름하면서 체중이 불지 않는 가금류를 보살피느라 시간을 낭비하느니 빨리 판을 새로 까는 것이 그들에게 손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다. 축산업자에게 가금류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축산업은 가축을 키워서 경제적인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산업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축은 살아있는 생명이고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다. 우리가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 키우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생명을 마구 대해도 되는가라는 윤리적 문제는 남는다. 우리는 그러한 동물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대해도 되는 것일까?
이 부분은 동물이라는 생명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에 의해 생각이 나뉘게 된다. 동물을 인간의 소모품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어차피 돈 벌자고 키우는 것인데 돈이 되지 않으면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지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되냐고 생각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동물이라는 다른 생명을 그렇게 다루어도 되는가 하는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극단적인 사례를 하나 들겠다. 2002년 군산의 집창촌에 화재가 발생하여 성매매 여성 14명과 남자업주 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다. 이들은 감금을 당한 채 성매매에 동원되던 사람들이었다. 포주는 성매매 여성들을 감금시켜 놓고 성매매에 동원을 한 후 영업시간이 끝나면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감금시켜 놓았다. 그러다가 화재가 발생하여 성매매 여성들은 건물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포주가 돈벌이를 위하여 성매매여성을 감금시켜 놓고 성매매에 이용하는 것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포주는 돈벌이를 위하여 성매매여성을 감금시켜 놓고 이용했다. 이러한 행위에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축산업자들은 돈벌이를 위해서 가금류를 좁은 철망장에 가두어 사육한다. 그리고 질병에 걸리는 경우 돈벌이에 장애가 될 듯하니 살아있는 생명들을 포대자루에 넣어서 땅에 파묻어버린다.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다. 포주도 경제적인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는 똑같은 이유로 성매매 여성을 감금시켜 놓고 이용했다. 둘 다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윤리적인 비난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용인을 한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동물은 영혼이 없기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 없고, 고통스러운 듯한 동작을 취하는 것은 뻐꾸기시계가 시간이 되면 뻐꾹 거리듯이 내부에 그러한 장치가 되어 있어서 고통스러워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짓는 자동기계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렇게나 대해도 된다며 실제로 살아있는 동물을 산 채로 해부하기도 하였다. 수의사들 중에는 데카르트와 같이 동물이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감금된 여성은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그리 대하면 안 되고, 동물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대해도 된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두 경우 모두 고통을 느낌에도 불구하고, 성매매 여성을 그리 대하는 것은 용인할 수 없고 가축을 그리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 근거는 무엇인가? 만약 그 근거가 성매매여성은 인간이기 때문이고 가축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피터 싱어는 그러한 사람을 종차별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여기에서 제기된 문제는 ‘우리가 단지 인간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다른 생명을 이러한 방식으로 대해도 되는가’라는 문제이다. 과연 우리 인간이 다른 생명을 이러한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해도 되는 것일까? 누가 그러한 권능을 인간에게 부여하였는가?
잔 카네즈는 인간이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동물을 잡아먹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잔 카제즈,「동물에 대한 예의」). 그것은 동물의 생명도 소중하지만 동물 못지않게 인간의 생명 또한 소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을 이용하는 것이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닐 때에는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한다고 했다.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공장식 축산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과도한 육식에 대한 탐욕과 축산업자들의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진행되어 온 방식이다. 또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가축 전염병으로 인한 살처분은 더더욱 인간의 생존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단지 축산업자들이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가축을 수단으로 여기기 때문에 진행된 것이다. 더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하여 수천만 마리의 생명을 살처분 하는 방식은 반생명적인 행위이다. 또 이러한 행위는 생명윤리적인 문제를 회피할 수 없다.
우리가 다른 생명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도 되는 것인지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 생명의 관계성을 비롯하여 생명에 대한 더 깊은 이해에 관심이 있는 분은 필자의 저서 『생명은 서로 돕는다』 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