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칼럼] 박종무의 생명 이야기 ③ – 모든 생명은 서로 돕는다
2014년 1월에 발생한 AI로 인하여 1천200만 마리가 넘는 가금류가 살처분됐다. 말이 1천200만 마리지 그 숫자는 엄청난 숫자이다. 이번에 발생한 AI 말고도 시시 때때로 가축전염병이 발생하면 그 때마다 1천 만 마리 가까운 가축들이 살처분된다. 이러한 행태가 구조화되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살처분은 전염병에 의한 가축 살처분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매년 3만 마리 가량의 유기견들이 안락사라는 이름으로 살처분되고 있다.
이들 동물들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모두 소중한 생명들이다. 이런 생명을 한두 마리도 아니고 1천 만 마리 가까이 시시때때로 살처분하는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데카르트는 동물은 영혼이 없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기계장치와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동물을 다루고 있는 수의사이다. 우리는 우리가 대하고 있는 모든 동물들이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또 고통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이들 동물은 인간과는 다르지만 각자의 본능을 가지고 사는 생명들이다.
이들 생명은 저마다 누가 평가할 수도 없고 침범할 수도 없는 내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런 생명들이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시시때때로 천만 마리가 넘게 살처분되고 있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자.
나는 건강상에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전염병에 걸렸다며 단지 3km 인근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느 누구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행위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다.
윤리적인 제1원칙이 있다. 윤리적인 원칙이라고 해서 어렵거나 복잡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네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우하라’는 것이다. 네가 누군가로부터 폭력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다면 너 또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말을 빌리자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자신이 당하기 싫은 폭력을 동물을 상대로는 시시때때로 자행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동물과 인간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 동물을 대하는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한다.
오늘날 우리가 다른 종의 생명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가 가진 생명에 대한 생각과 다른 생명을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서 결정된다. 생명과 동물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이 오늘날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과 동물은 전혀 다른 존재이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 약육강식은 자연의 법칙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부터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고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뼈 속 깊이까지 인간과 동물은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또 세상은 약육강식의 세계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배운다. 세상은 그런 곳이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배운다.
그리하여 그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노력하고 자신으로 인해 상처받거나 고통을 받는 이에 대해서는 세상은 그런 곳이라며 모른 척 한다. 이러한 생각은 다른 생명들에게까지 이어진다. 다른 생명에게 대하는 폭력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생명관은 너무도 잘못된 것이다.
지구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다. 그 수많은 생명들의 겉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약육강식의 형태로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는 시각을 약간만 달리 하면 같은 현상도 다르게 보인다.
생명들은 다른 생명들 덕분에 살 수 있고 또 자기 자신도 누군가의 생명을 살리는 먹이가 된다. 그렇게 생명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게 생명이 35억년 동안 ‘살림’의 순환 관계를 맺으며 지구라는 별은 수많은 생명이 가득한 초록별이 되었다.
그런데 그 별에 ‘가장 뛰어나고 위대한 생명’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인간이라는 생명이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은 이성을 가져서 위대하기 때문에 또는 신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생명들은 인간의 편의를 위한 도구나 수단쯤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생명들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주는 근원이라는 생각도 없고 또 그 생명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별로 없다. 지구상의 생명들은 인간의 먹이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모든 생명을 평가하는 기준은 인간의 이익이며 당장 인간에게 불이익을 가져온다면 가차 없이 없애버린다.
그리하여 구제역이나 AI와 같은 가축전염병 사태가 발생하면 1천만 마리가 넘는 가축이라는 생명을 살처분한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한 해 3만이 넘는 종들이 멸종되고 있다. 그래서 리처드 리키와 로저 르윈은 지금을 ‘제6의 멸종기’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정글의 법칙’이나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말을 내세우며 다른 생명에 대한 폭력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러한 말들은 사람들이 동물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 인간 사회 내에서도 강자들이 약자에 대한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법칙이 없다. 정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산다. 사람들은 그 속에 어떤 종류의 생명들이 살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몇 백 년 된 우람한 나무 하나에만도 뿌리에서부터 나무 끝까지 몇 백 종류의 생물종이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살고 있다.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들이 정글 전체에 얽히고설켜 가득 차 있다. 사자처럼 강한 동물도 살지만 사슴이나 나비, 풍뎅이와 같이 약한 생명들도 그 보다 훨씬 더 많이 살고 있다.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경쟁, 경쟁, 경쟁의 노래를 들으면서 살아왔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시로 시험을 봐서 1등부터 꼴등을 가리고 대입, 입사, 사회생활을 이어지면 끝없이 경쟁을 강요 받는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이 얻는 성과는 당연한 것이고 경쟁에서 낙오한 이들이 처하는 암울한 현실은 그들이 경쟁에서 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세상이 그런 곳이고 자연이 그런 곳이라고 생각을 한다. 생명은 그러한 경쟁의 진화 과정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것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지배자가 가지고 있는 것, 약자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또 경쟁에서 조금 이긴 사람은 자신이 갖게 되는 과다한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경쟁 시스템을 당연한 것이라며 옹호한다.
하지만 생명은 그런 관계를 갖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은 경쟁을 통해서만 진화하고 생존하는 것이 아니다. 경쟁은 한 부분이고 큰 틀에서는 서로 도우며 생존한다.
인간 사회 또한 상부상조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다만 폭력에 의해 지배자가 된 자들이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를, 또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관철된 역사를 기술하고 유포함으로써 사람들은 상부상조의 역사를 잊고 경쟁과 전쟁만이 난무하는 역사를 배우게 된 것이다.
생명의 역사를 살펴보면 자연의 생명들은 다른 생명과 어떤 대상을 놓고 경쟁하기보다는 생태계의 여백을 찾아서 진화해 왔다. 약육강식만이 횡행하는 자연계였다면 강자들만 살아남고 약자들은 생존할 수 없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지금 사람들은 그러한 풍경을 볼 수 없어서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인간의 손이 미치지 않았던 곳은 생명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유명한 프레데릭 백의 작품 중에 「위대한 강」라는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을 보면 유럽의 침략자들이 신대륙에 들어오기 전에 신대륙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살고 있었는지 묘사되어 있다.(위의 두 작품을 보지 못하셨다면 기회가 되실 때 감상해보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창공을 가득 채운 새의 무리들
섬을 온통 뒤덮은 쇠오리와 바다오리떼들
탐험가와 선원은 넋을 잃었다 “
프레데릭 백의 작품뿐만 아니라 많은 글들을 보면 ‘인간이 파괴하기 전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넘쳐났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 광경은 오래 전의 광경만이 아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에 첫 발을 디뎠을 때 그곳에는 엄청난 수의 버펄로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버펄로의 이동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그 행렬이 지나기까지 3박4일이 걸리기도 했다고 한다(그 많던 버펄로들을 유럽인들은 원주민을 몰아내고 소떼를 키우기 위하여 단시간에 몰살 시켜버렸다).
이런 생명이 넘쳐나는 풍경은 아메리카 신대륙뿐만이 아니었다. 유럽인들이 첫 발을 내딛는 모든 곳에는 헤아릴 수 없는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생명은 다양한 진화 과정을 거치며 생태계를 더욱 풍부히 하여, 더 많은 생명이 살 수 있는 근원이 되었다. 생명의 진화로 생태계에는 더욱 다양한 연결고리가 만들어졌고 그 연결고리로 만들어진 생명의 그물망은 더욱 안정적이며 풍요로워졌다. 그렇게 생명은 공존의 그물망을 만들어왔으며, 생명은 그 그물망 속에서 다른 생명과 관계에 의해 존재한다.
다른 생명과의 온전한 관계가 없으면 그 생명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생명은 ‘관계’다.
또 생명은 오랜 시간에 거쳐 상호간의 관계 속에서 진화해왔다. 그래서 생명은 ‘관계의 역사’ 그 자체다.
그런데 우리는 생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관계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다. 인간만이 최고로 진화한 고등동물이라고 우쭐거린다. 인간이 아무리 우쭐거려도 생명은 서로 공존을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는 섭리에서 예외일 수 없다. 인간도 그 생명의 고리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 자연에서 스스로를 초월적인 존재로 여기며 자연의 다른 생명들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그러한 폭력적인 방식에 의해서 1년에 3만 종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 생명은 그물망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모든 생명이 위험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금과 같이 인간이 자연의 생명들과 공존하는 방식이나 순환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자연의 생명체들에게는 고통이 되고 인류에게도 비극이 될 것이다.
1년에 3만 종이나 멸종시키는 우리의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은 지속될 수 없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AI 사태에는 단순히 우리가 죽이는 가금류에 대한 생명윤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사료 곡물 생산에 따른 화석 에너지 남용과 밀림의 파괴와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문제는 기후변화와도 연관이 있는 문제이고 실제로 기후변화는 다양한 형태로 인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생명과의 공존을 고민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도 아니고 선택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다른 생명체들과 공존해야만 인간 또한 살아남을 수 있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동물을 비롯한 인간 이외의 생명들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은, 자연의 생명들을 같은 생명으로서 존중하기보다 우월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중심적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간중심적 생명관은 오늘날 생명과 관련된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 하지만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인간중심적 생명관은 그 뿌리가 너무나 깊이 박혀 있어서, 이러한 사고의 패러다임을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를 포함하여 우리의 미래세대가 지속 가능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모든 생명은 서로 돕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에 대한 생각은 재고되어야 할 많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특히 생명들의 관계에 대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여 무덤덤하게 받아들이지만 그 속에 왜곡된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필자의 책 『모든 생명은 서로 돕는다』는 생명에 대하여 또 생명의 관계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