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진료비를 보장해주는 펫보험이 제2의 중흥기를 꿈꾸고 있다.
메리츠화재 ‘펫퍼민트’를 필두로 지난해부터 여러 손해보험사들이 펫보험을 새로 내놓았고, 높아진 관심은 판매량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개원가에서도 경험하기 어려웠던 보험청구가 하나 둘 이어지며 새로운 이슈를 야기하고 있다. 바로 환자의 진료기록을 공유하는 문제다.
특히 출시 반년여 만에 15,000건 이상이 판매된 메리츠의 펫퍼민트 보험이 진료기록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심사에 나서면서 이슈가 수면 위로 떠 오르고 있다.
초점1. 보험사 ‘보험사기 막으려면 진료기록 필요하다’
메리츠의 펫퍼민트 보험은 보험금 청구 시 환자의 진료기록을 요구하고 있다. 청구 건의 진료기록뿐만 아니라 해당 환자의 예전 진료기록도 보호자의 동의 하에 확보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메리츠 측은 펫보험이 건전하게 정착되려면 청구 환자의 진료기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메리츠 관계자는 “보험 가입 직후 1개월(가입일로부터 1개월간 발생한 진료비는 보장 대상이 아님)이 지나자마자 호르몬질환, 심장병 등 만성질환에 대한 청구가 들어오면 (보험사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보험 가입 전부터 앓던 질환은 보장대상이 아님에도 마치 초진인 양 둔갑해 보험금을 노리는 사례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수의사가 별달리 협조하지 않더라도, 다니는 동물병원을 바꾸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시도할 수 있다.
이 같은 보험사기로 새나간 보험금은 결국 선량한 다른 가입자들이 분담할 수밖에 없다. 사기를 막아야 좀 더 저렴한 가격으로 보험료를 책정할 수 있고, 보다 많은 동물에게 보험혜택을 줄 수 있다.
메리츠 관계자는 “보험이 정착할수록 동물병원 진료시장 성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대부분의 동물병원이 진료기록 제공에 협조해주시고 있다”고 전했다.
초점2. 수의사 ‘진료기록 전부를 내어 주는 건 곤란하다’
본지는 다양한 규모의 일선 동물병원 수의사들과 수의사회, 수의과대학 임상과목 교수진 등 10명 이상의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보험 관련 진료기록 공유에 대한 의견을 수집했다.
보험 청구와 관련해 보호자에게 제공해야 할 바람직한 형태에 대해서는 시각차가 있었지만, 모두 ‘병원이 작성한 진료기록을 그대로 모두 제공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입을 모았다.
진료기록부에는 고객과 환자의 민감한 정보는 물론 동물병원 외부로 공개돼선 안될 운영상의 기록이나 진료 노하우 등이 총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내 동물병원의 A원장은 “자가진료가 여전하고 의약품 유통관리가 미흡한 상황에서 약물을 포함한 진료기록을 외부에 노출하기는 어렵다”며 “진료기록 작성방식도 표준화되지 않아 병원마다 다른 데다가, 민감한 내용을 적는 경우도 있어 진료기록부 노출 시의 악영향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경기지역 동물병원의 B수의사는 “전자차트의 ‘subject’에 기록한 내용까지 모두 주는 것은 부담이다. 나중에 문제될까 걱정도 된다”고 말했다.
동물병원에 진료기록을 요구하기 앞서 수의사들과 협의가 부족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현행 수의사법에 동물병원이 보호자에게 진료기록을 내어줄 의무가 없는데도, 마치 진료기록 제공을 거부하는 병원 때문에 보험금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얘기다.
최영민 서울시수의사회장은 “수의사회와 사전협의도 없이 보험금 청구에 진료기록이 필요하도록 한 것은 잘못”이라며 “보험이 진료비 부담 완화에 역할을 할 수 있다고는 보지만 어떤 형태로 기록을 공유할 지는 수의사 주도의 협의가 필요한 문제”라고 말했다.
초점3. ‘진료행위별로 평가할까’ 우려도..보험사 ‘행위별 평가 하지 않는다’
‘행위별 평가’에 대한 우려도 동물병원이 진료기록을 제공하기 부담스러워하는 이유 중 하나로 꼽혔다.
담당 수의사가 진행한 진료행위를 두고 ‘과잉진료’인지 여부를 보호자나 보험사가 일방적으로 판단해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펫보험의 보장여부는 기본적으로 보호자(가입자)와 보험사 간의 문제이지만, 진료행위별로 일부만 보장할 경우 보호자의 항의로 이어져 결국 수의사 진료권을 간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 수의과대학의 임상과목 담당 C교수는 “현재 펫보험은 보장하지 않는 질병을 제시하고, 이에 해당되지 않는 보장질병이라면 진료횟수나 회차별 보장액 상한을 두는 방식 아니냐”며 “수의사가 해당 질병임을 공식적으로 밝힌다면, 환자에 대한 검사나 처치내용이 합당했다고 보고 (상한 금액 안에서) 전부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메리츠 측은 “환자별 진료기록을 모아 분석한 결과로 행위별 보장여부를 판단할 거라는 추측은 오해다”라고 선을 그었다.
사람의 건강보험처럼 행위별로 판단을 내리는 것은 민간 펫보험사에게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메리츠 관계자는 “환자에게 어떤 처치는 적합하고, 어떤 처치는 과잉이라는 판단을 내릴 기준이 없지 않느냐”며 “행위별로 나누어 보장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초점4. 보험 정착은 필요..진료기록 제공의 적절한 형태는?
이처럼 진료기록을 통으로 내어주거나 행위별로 평가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나왔지만, ‘진료 정보를 일정 수준까지 공유할 필요가 있다’는 시각도 다수 확인됐다.
수의사단체의 D관계자는 “보호자가 보험을 잘 활용한다면 진료비용 부담을 줄일 수 있고, 그 혜택은 결국 동물에게도 돌아가게 된다. 문제가 없는 선에서 이를 돕는 것은 수의사의 윤리적인 역할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메리츠 측도 보험이 자가진료 문제를 줄이고 내원을 늘리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 강조했다.
메리츠 관계자는 “국내 사람 의료계나 해외 동물병원 사례를 보더라도 보험은 의료시장 확대에 기여했다”며 “보험 가입자는 진료비 부담이 감소하는 만큼 진단검사와 치료에 더 적극적”이라고 전했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일선 수의사들도 모두 장기적으로 보험이 진료시장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다만 진료기록 제공요청에 대응하는 방식에는 온도차가 엿보였다.
보호자의 동의가 있다면 진료기록을 제공한다는 수의사부터 진단서와 영수증 외에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는 수의사까지 다양했다.
제3자로의 정보제공에 부담을 느껴 보호자에게만 진료기록을 내어준다는 원장이 있는가 하면, 보호자에게 제공했을 때의 부작용을 우려해 보험사로 직접 보내는 쪽을 선호하는 원장도 있었다.
서울시내 동물병원의 E원장은 “실제로 어떤 처치와 어떤 검사를 했고, 항목별로 얼마의 비용이 나왔는지 정도까지는 (보호자나 보험사에게)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A원장은 “병원마다 (진료기록을) 어디는 주고 어디는 안 주는 식으로 달라지지 않도록 수의사단체 차원에서 일관된 대응방식을 정했으면 좋겠다”며 “진료에 대한 정보는 일정 부분 보호자의 알권리이기도 한 만큼, 형태가 합의되면 병원도 협조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D관계자는 “병원이 정보공유 행정업무에 들이는 수고에 대해 합당한 보상책도 제시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초점5. 보험사기 제안하는 보호자들로 동물병원도 골머리
한편, 취재과정에서 접촉한 임상수의사들 대다수가 “최근 1년 사이에 보호자로부터 보험사기에 협조해줄 것을 제안받은 경험이 있다”고 털어놨다.
가령 만성적인 외이염에 시달리던 강아지가 여러 번 치료를 받았는데, 보험에 가입하겠다며 마치 초진인 것처럼 기록을 꾸며 달라고 요청하는 식이다.
이처럼 진료기록 제공 문제보다 보험사기 권유가 거듭되는 것이 더 문제라는 지적이 많았다.
경기지역 동물병원의 F원장은 “(보험사기는)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 일이지만, 공범이 되자는 식의 요구가 계속 들어오면 도리어 화가 난다”며 “의사에게는 감히 할 수도 없을 제안을 수의사에게는 하는 것 같아 진절머리가 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서울시내 동물병원의 G수의사도 “진료기록 수정이나 삭제는 안 된다고 처내고 있지만, 유혹에 흔들리거나 망설이는 수의사들도 생길 수 있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