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은행·실기시험` 수의사 국가시험 개선방향 공감대
검역본부 주관 형태로는 개선 어려워..별도 조직·예산 확보 선행돼야
한국수의교육학회(회장 이기창)는 대한수의사회 의뢰로 진행 중인 ‘수의사 국가시험 현황 분석 및 개편 필요성 조사’ 연구용역의 중간 결과를 9일 서울대 수의대에서 공개했다.
출제위원에 따라 문항 구성이 휘둘리고, 응시생들은 음성적으로 복원한 기출문제에 매달리는 현 상황을 개선하려면 우선 문제은행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날 학회는 문제은행, 실기시험 도입 등 수의사 국가시험(이하 국시)을 개편하려면 시험을 주관하는 별도 조직과 예산이 선행돼야 한다는데 입을 모았다.
문제은행화·핵심역량 적용에 공감대
연구진의 천명선 서울대 교수가 최근 국시 응시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인터뷰에서는 국시 개선방향으로 ‘문제은행’과 ‘실기시험’ 도입이 제시됐다.
문제은행을 만들어 출제와 시험준비에 활용하면, 출제위원에 따라 문항구성과 난이도 편차가 커지는 문제를 줄일 수 있다.
천 교수팀이 국내 수의대 교수진 12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79명(65%)이 문제은행 구비가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설문조사 응답자의 66%가 2011년 이후 국시 출제 경험이 있는 교수들인 만큼, 출제자 측면에서도 문제은행 필요성에 공감대가 있다는 얘기다.
문제은행을 통해 미리 문제를 만들고 여러 번 검토하면 그만큼 높은 품질을 확보할 수 있다. 한 교과목 안에서 고르게 문제를 출제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 현재 수의대 교수진으로 한정된 출제자 풀을 확대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각 수의학 분야의 박사급 인재나 다양한 직종의 현장 전문인력을 참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국시가 다루는 내용을 표준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한국수의과대학협회 교육위원회가 수년에 걸쳐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역량중심 수의학교육 학습성과를 국시에도 공통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상섭 건국대 교수는 “수의학교육 학습성과에 국시 출제를 맞춘다면, 지엽적인 문제가 출제되거나 연도별 편차가 심해지는 문제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김용준 한국수의학교육인증원장은 “문제은행을 중심으로 국가시험을 연중 준비한다면, 문제 검토과정도 늘어날 수 있고 시험관리도 보다 수월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기시험 도입·임상교육 개선 함께 가야
이번 수의교육학회 연구에서 국시 실기시험 도입 필요성에도 응시생·교수진 모두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천 교수의 설문조사에서 참여교수 121명 중 65명(53%)이 실기시험 도입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응시생 인터뷰에서도 국시 개선방안에 실기시험이 반복적으로 언급됐다.
천 교수는 “학생들도 실기시험이 도입돼야 각 대학의 임상교육이 정상화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의사 국가시험은 주요 증상별로 진료수행지침(CPX)과 필수임상술기(OSCE)를 체계화하고, 이를 평가하는 실기시험을 치르고 있다. 치과의사 국가시험도 2022년부터 실기시험이 도입될 전망이다.
실기시험을 도입한다 해도 준비기간은 상당시일이 소요될 전망이다. 연구진에 따르면, 2012년부터 실기시험 도입을 논의한 치의학계도 10년만에 실기시험을 운영하는 셈이다.
실기시험과 병행되어야 할 대학 임상교육 강화도 과제다.
이날 학회에서 한 교수는 “임상교육의 중요성을 말하곤 하지만, 실제 대학 내에서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의문”이라며 “부속 동물병원 인프라 확보, 임상교수진 확충 등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실기시험) 국시 개편을 검토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검역본부 주관으로는 변화 기대 못해..국시운영조직 독립해 예산 확보해야
이 같은 문제와 해법은 20여년 전부터 이미 지적된 것들이다. 2002년 실시된 ‘수의사국가시험 제도 개편 방안 연구’에서도 수의사 직무분석에 따른 평가목표 설정과 수험생 사전고지, 문제은행 운영 등이 제시됐다.
하지만 이를 추진할 별도 조직과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다 보니 20년간 답보상태에 머물렀다는 것이다.
김대중 충북대 교수는 “전문조직과 예산 없이는 문제은행, 실기시험을 도입할 수 없다”며 “90년대나 지금이나 국시에 투입되는 조직·예산은 그대로”라고 지적했다. 검역본부가 국시를 주관하는 현재의 형태로는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보건의료 전문직 시험을 주관하는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국시원)에 합류하는 방안도 아직 회의적이다.
이기창 회장은 “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은 수의사 국가시험 관리업무에 대해 미온적인 입장”이라며 “1년에 550명 정도인 응시인원 대비 수익성이 적고 지원 예산도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결국 수의사 국시를 운영할 별도의 법인을 설립하고, 국가 예산 지원과 수험료 현실화 등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출제인력을 확대하고, 문제은행을 만들고, 실기시험을 치르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기창 회장은 “향후 국가시험위원회 운영방안과 출제과정·문제유형을 포함한 세부적인 국시 개편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문제은행 운영방법과 실기시험 도입계획도 검토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수의교육학회의 이번 연구는 오는 2월까지 마무리될 전망이다. 대한수의사회 수의정책연구원은 구체적인 국시 개편안 마련을 위한 후속연구를 바로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