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행 1년도 안 남았는데‥동물보건사 세부기준 제정 아직 `뒷전`
대수, 침습행위 불허 합의 유지돼야..허주형 ‘합의 파기 시 제도 무력화 불사’
동물병원 내 진료보조인력으로 공식화된 ‘동물보건사’가 제도 시행까지 1년도 남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업무범위와 커리큘럼 등 세부기준이 정해지지 않아 문제로 지적된다.
대한수의사회는 4일 성남 수의과학회관에서 열린 출입기자 간담회에서 “동물보건사 관련 하위법령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며 “당초 주사·채혈 등 침습행위를 허용하지 않는 형태로 맺은 합의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고 밝혔다.
동물보건사 양성기준 구체화 안됐는데 관련 학과는 속속 신설
입학생·재학생 혼란 불가피
2016년 반려동물 자가진료 철폐와 함께 논의된 수의테크니션 제도화는 지난해 수의사법 개정으로 확정됐다. 동물병원 내에서 수의사의 지도 아래 동물의 간호 또는 진료보조업무를 수행하는 ‘동물보건사’로 규정됐다.
전문대학 이상의 교육기관의 동물 간호 관련 학과를 졸업한 사람이 자격시험을 거쳐 동물보건사가 될 수 있다.
해당 교육기관은 평가인증을 거쳐 농식품부 장관의 자격인정을 받아야 한다. 간호·진료보조업무의 구체적인 범위는 하위법령(수의사법 시행규칙)으로 정하도록 했다.
문제는 커리큘럼, 시험과목을 비롯한 평가인증 기준과 절차, 구체적인 업무범위 등을 규정할 하위법령 제정이 자꾸만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2021년 8월에 동물보건사라는 자격증이 생긴다’라는 구호만 있을 뿐 구체적인 청사진은 없다. 그럼에도 교육현장에서는 동물보건사를 내세워 신입생 모집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2020년 이후로만 부산경상대, 가톨릭상지대, 대구한의대, 세명대, 호서대, 광주여대, 경성대, 경인여대, 전주기전대 등 여러 대학이 동물보건사 관련 학과를 신설했다.
이미 신입생을 모집했거나 내년부터 학사과정에 돌입하는데, 양성기관 인증을 받기 위해 갖춰야 할 커리큘럼이나 교육환경 등 세부기준은 제시되지 못했다. 이들 대학의 졸업생이 동물보건사가 될 수 있는지 아직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입학생부터 뽑고 보는 식이다.
동물보건사 관련 세부기준이 늦게 마련될수록 졸속 운영의 위험도 높아진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우연철 대수 사무총장은 “현재 국내 40여개교가 동물보건사 관련 학과를 운영하고 있지만, 동물보건사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된 적도 없고 관련 의견조회도 없다”며 “이미 관련 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엄청난 혼란을 겪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동물병원 진료보조인력, 얼마나 있고 얼마나 더 필요한지도 불투명
수의대 정원에 비해 동물보건사 과다 배출 우려도
한 해 배출될 동물보건사의 수가 몇 명인지, 그 수가 적정한지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다는 점도 문제다.
향후 동물보건사 배출 연인원에 대한 전망을 묻는 질문에 허주형 회장은 “매년 1천명 이상 배출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도 “저도 동물병원을 했지만, 동물보건사 제도가 생긴다고 있던 사람을 내쫓을 일도 아니다. 실제 동물병원에 갈 수 있는 인력은 많지 않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동물보건사 제도 시행 전인 지금도 동물병원에는 자체적인 진료보조인력(테크니션)이 있다. 반려동물 관련 학과 전공자도 있지만 일반 고졸자부터 비전공자까지 구성이 다양하다.
2016년 당시 정부는 이들 진료보조인력 현업 종사자의 규모를 약 3천명으로 추정했다. 동물보건사가 제도화된다 한들 일선 동물병원에서 진료보조인력의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 볼 요인도 찾기 어렵다.
기존 인력이 동물보건사 자격증을 가진 상태로 대체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미 현장에서 일하는 테크니션은 별도 실습교육이수 등을 조건으로 동물보건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경과규정도 뒀다. 이대로는 졸업생들이 갈 곳을 찾기 어려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 대한수의사회에 신상신고를 접수한 수의사 14,830명 중 반려동물 임상수의사는 5,673명으로 약 38%를 차지하고 있다.
젊은 수의사들이 상대적으로 반려동물 임상을 선호한다는 점을 고려해도, 매년 신규 배출되는 반려동물 임상수의사는 수의대 정원의 절반가량인 250~300명으로 추정된다.
반려동물 임상수의사 숫자가 늘어나면 진료보조인력 수요도 커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만, 대한수의사회가 파악한 국내 반려동물 관련 학과 35개의 입학정원은 2천명이 넘는다.
이들 학과 졸업생이 전부 동물보건사를 지망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의과대학 정원(연550 내외)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우연철 사무총장은 “애초에 정확한 전망이나 추계없이 (해외에는 수의테크니션 일자리가 많다는) 언론보도 하나로 시작된 일”이라며 “정부도 처음에는 일자리 창출을 이야기하다 이제는 직종의 전문화를 주장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전담인력 적고, 방역업무에 치이고..수의정책은 뒷전
주사·채혈 등 침습행위 절대 불가..’합의 파기 시 제도 무력화’
대한수의사회는 당초 농식품부, 동물복지학회 등이 참여한 2016년 TF에서 주사, 채혈 등 침습적인 의료행위를 제한하고 수의사회가 시험 및 인증업무를 주관하는 형태에 합의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농식품부 내부적으로 TF 합의를 적용치 않으려는 움직임이 포착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지난해 말 동물보건사 관련 하위법령 개정안을 협의했지만 농식품부 내부 결재 과정에서 불발된 후 계속 미뤄졌고, 동물보건사 자격 운영 업무 수행가능 여부를 수의사회가 아닌 타 기관에 문의한 정황이 있다는 것이다.
대한수의사회는 동물보건사의 업무범위를 반려동물, 비침습적 업무로 한정한다는 원칙 하에 협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허주형 회장은 “정부가 기존 합의를 파기하고 동물보건사가 수의사회의 손을 떠나는 순간 제도를 무력화시킬 것”이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대한수의사회가 관련 업무를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동물보건사 제도화 준비작업이 졸속으로 치닫고 있는 데에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농식품부 방역정책국에서 수의사법을 담당하는 인력은 2명뿐이다. 2013년 똑같이 2명이 담당하던 동물복지 관련 업무가 이미 동물복지정책과 13명으로 늘어난 것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다.
그마저도 가축방역 업무와 병행하는 데다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발생, 담당자 교체 등이 겹치며 관련 작업을 진행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허주형 회장은 “정부에 동물의료정책과가 없다 보니 수의 관련 정책이 제대로 준비되지 않고 무책임하다”며 동물의료발전 종합대책 수립을 건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