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익숙한 문·이과 나누기로 하자면 수의학은 자연과학인 이과에 속한다.
그리고 인문학은 이런 자연과학을 뺀, 뭔가 사람냄새가 물씬 나는 학문들을 통칭한다. 흔히들 말하는 문학, 역사, 예술, 철학 같은 분야들이다.
그렇다면, ‘인문수의학’이라는 건 시작부터 모순투성이인 셈이다. 게다가 ‘학’을 붙여 뭔가 무겁고 지루한 느낌마저 든다.
한 학문의 경계는 어떻게 구분될까? 우리가 수의사로서 일하면서 접하게 되는 문제들은 우리가 대학에서 공부한 과목의 지식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일까?
최근 ‘학문 분야간의 장벽을 허물고 열린 생각과 방법론을 적용하는 것을, 우리는 융합이라고 부르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어쩌면 자연스럽게 융합되어 있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기전을 한 학문 분야로 분석하려는 애초의 노력 자체가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유사한 용어를 사용하는 분야로 의료인문학, 또는 인문의학(medical humanities)은 어떨까? 이 분야는 인간의 건강과 질병을 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의 눈으로도 바라보고, 인간의 삶을 해명하는데 있어서 과학과 인문의 소통을 장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의학의 역사와 철학, 윤리, 사회적인 측면을 다룬다(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2007).
약간 다른 개념이지만 브뤼노라투르의 ‘과학인문학’은 기존의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구분 자체를 흥미롭게 뛰어 넘고 있다. 인류학, 철학, 사회학, 경영학을 넘나드는 이른바 ‘하이브리드 사상’이라고 불린다(브뤼노라투르, 2012).
인문수의학 역시, 인문의학이나 과학인문학과 비슷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역사나 사회,철학, 예술의 측면에서 수의사를, 그리고 수의학을 해석하고 분석하는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 질 수 있다.
때로는 인간과 동물과의 거리 어디쯤에서 양쪽을 모두 관찰하고, 양쪽의 이익을 모두 보호해야 하는 우리 수의사는, 약간은 색다른 시각을 가진다. 이 시각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시간과 공간에서 보다 ‘현명한 사람’으로서, 인간과 동물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게 도와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인문수의학(굳이 말을 만들어보자면veterinary humanities)은 또 다른 융합분야인 인간동물학(Human Animal studies)과도 그 맥락을 공유한다. 인간동물학은 인간 사회와 문화에서 동물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 인간과 동물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분야로서 인간동물학은 최근 20년 사이에 의미 있는 성장을 이루었다(DeMello,2012).
늘어 놓다 보니, 쓸데없는 강의 편람처럼 되어 버렸다. 사실 지루한 얘기를 시작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나 스스로가 그리 심각한 주제를 다룰만한 능력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히려 잡다한 수의학 이야기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그 시작은 말을 잘 다루었던 어떤 현명한 사람에 대한 옛 이야기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꽤 오래 전인 춘추전국시대, 목공(穆公)휘하에 손양(孫陽)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에 대해 많이 알고 잘 훈련시킬 뿐 아니라 침도 용하게 잘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의 말을 관리하는 별자리 이름을 따서 그를 백락(伯樂)이라 불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마의학 서적인 ‘신편집성마의방(新編集成馬醫方)’에 실려 있는 ‘백락침경(伯樂針經)’ 편은 그의 이름을 딴 옛 고전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자연 상태의 ‘그대로 있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장자(莊子)는 백락이 말을 훈련한다는 구실로 오히려 괴롭히고 있다고 비난한 바 있다.
백락의 이름은 수의학전문 서적에서뿐 아니라 고사성어에서도 눈에 띈다.
백락이 시장에서 말을 한번 돌아보자 말 값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담은 ‘백락일고(伯樂一顧)’는 그만큼 그의 안목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르게 뛰어나 유명했음을 증명한다. 그래서 백락이란 이름은 혜안을 가진 사람, 천리마, 즉 인재를 알아보는 능력을 가진 사람의 대명사로 쓰인다.
당나라 한유(韩愈)는 잡설(雜說)에서 “백락이 있은 후 천리마가 있었다(世有伯樂然後有千里馬)”고 하여 인재는 많으나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적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백락상마(伯樂相馬)’ 또한 같은 맥락으로 쓰이는 고사성어다.
그러나 그도 영리한 아들을 두지는 못했던 것 같다. 한 번은 백락이 아들을 앉혀 놓고 명마를 보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눈은 이러이러하고, 이마는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일러주자, 아들이 이런 특징을 똑같이 가진 동물을 찾아왔는데 그게 말이 아니라 두꺼비였다. 이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 ‘백락자(伯樂子)’다. ‘백락자(伯樂子)’는 ‘백락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고지식하고 멍청한 자를 일컫는다.
무엇인가를 또는 누군가를 잘 안다는 것은 그 대상을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이자 능력이다. 현명함을 기술로 표현하자면 이런 능력은 일종의 기초 수준인 셈이다.
수의사가 가진 이런 세심함은 아주 오래 전부터 주목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다. 말을 하지 못하는 대상인 동물을 헤아리는 사람은 관찰력이 뛰어나고 진실된 사람일 수 있다는 기대와 믿음인 것이다. 그것이 인재를 알아보는 현명한 사람으로서의 ‘백락’이라는 일종의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닐까?
인문수의학이라는 이런 이상한 이름을 붙인 일련의 노력들이 수의학에서 이런 혜안을 끌어내는 훈련이자 도구였으면 한다는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참고서적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2007) 인문의학, 인문의 창으로 본 건강.휴머니스트.
브뤼노라투르/이세진 옮김(2012)브뤼노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인간과 자연, 과학과 정치에 관한 가장 도발적인 생각.사월의 책.
Margo DeMello(2012) Animals and Society: An Introduction to Human-Animal Studies. Columbia University Press (번역서 출간 2014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