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칼럼] 박종무의 생명 이야기 ⑤ – 개고기 먹는 수의사
케이블 TV tvN에서 방영하는 코미디 프로그램 중에 ‘누구나 궁금해 하지만 이런 걸 가지고 토론을 해야 하나’ 싶은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사망토론’이라는 코너가 있다. 이번 호에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나 싶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개고기를 먹는 수의사’ 이야기다.
조금 Hot한 부분이기도 하고 민감한 부분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번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하여 이야기를 꺼내본다.
동물보호단체는 매년 여름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개고기 반대 캠페인을 벌인다. 그에 따라 개고기를 찬성하는 사람들과도 끝없는 논쟁들이 벌어진다.
논쟁이 되는 논점은 몇 가지이다.
대강 살펴보면 ‘쇠고기, 돼지고기 같이 다른 가축은 먹는데 왜 개고기는 먹으면 안 되냐’는 것과 ‘다른 사람이 무엇을 먹건 그것은 그 사람이 선택할 사항이지 그것을 3자가 나서서 가타부타 이야기하는 것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또 ‘개고기는 우리의 전통 음식이고 이것을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은 외국의 문화를 강요하는 문화제국주의’라는 것이다.
개를 사육하거나 도살하는 과정이 비위생적이어서 안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개고기를 합법적으로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처럼 열악한 상황에 있는 것일 뿐 개고기를 합법화하고 모든 과정을 위생당국에서 감독하도록 하면 비위생적이라는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논쟁은 매년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개고기를 도살∙유통하는 과정이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개고기와 관련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오래된 자료이기는 하지만 1998년의 국정감사자료에 의하면, 국내에서 식용견을 취급하는 업소는 모두 6,484개소로 하루 평균 25t, 연간으로는 8,428t이 판매되며, 개소주로는 연간 93,600t이 소비되고 있어, 전체 개고기 소비량이 100,000t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또 2011년도 농림수산식품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2010년 12월 말 전국적으로 식용을 목적으로 하는 개를 사육하는 호수는 601,728호이고 사육되는 개체는 1,703,887마리였다. 대략 매년 200만 마리가 개고기용으로 사육되고 있다.
식용 목적으로 사육되는 개를 보통 식용견이라고 한다. 식용 목적을 위해 덩치가 크도록 키워진 개들이다. 집을 잃은 애완견들이나 동물보호소에서 안락사 된 개들 중에도 음성적으로 개고기업자에게 판매되는 경우도 있다.
식용견들은 대소변의 관리 편의를 위하여 ‘뜬장’이라고 불리는 철망장에 갇혀서 살아간다. 뜬장은 바닥이 철망으로 되어 있어 대변을 보면 바로 밑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관리하기에 편하다. 하지만 그곳에 사는 개들은 발바닥과 온몸이 철망 사이에 끼이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이 개들은 사료만 먹여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 때문에 음식찌꺼기나 도계장이나 도축장의 폐기물로 길러진다. 때로 다른 개들의 내장을 끓여서 먹이기도 한다.
또 도살과정에서 고기를 연하게 한다는 이유로 산 채로 목을 매달아 죽을 때까지 몽둥이로 두들겨 패는 잔인한 방식이 동원되기도 한다.
식용견들은 살아있는 순간부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고통을 받으며 살다가 고통을 받으며 죽어간다.
동물보호법 제8조는 목을 매다는 등의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는 행위, 노상 등 공개된 장소에서 죽이거나 같은 종류의 다른 동물이 보는 앞에서 죽이는 행위 등을 동물 학대 행위로 규정하고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매년 수백만 마리의 식용견이 학대와 다를 것이 없는 환경에서 사육되고 있음에도 이들을 규제하지 않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동물 학대 금지 규정은 개고기 문제에 대해서 무용지물이다.
식용견들은 살아있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 개고기와 관련된 논쟁에서 개들이 받는 고통은 무시된다.
개고기 찬성론자들은 소나 돼지나 닭들도 고기로 쓰여지기 위해 다 그런 고통을 받는데 식용견이라고 특별히 예외여야 할 이유는 없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가축들도 고통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에 개 또한 고통을 받는 것이 특별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가축들이 고통을 받는 공장식 축산 환경에서 사육되는 것이 문제이지, 그것을 당연한 기준으로 간주함으로써 개들 또한 그런 고통을 받는 것을 합리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개고기를 먹는 사람들은 개고기가 우리의 전통이라거나 또는 건강과 정력에 좋다고 옹호한다.
하지만 과거에 있었던 일이라고 모든 것이 전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계승하고 발전하여 인류가 추구하고자 하는 지향성에 이바지 할 수 있을 때 전통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축첩제도라는 풍습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전통이라고 이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반윤리적이기 때문이다.
개고기 또한 동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반생명적인 풍습으로 이제는 정리해야 할 풍습이다.
개고기는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민족들도 먹었다. 동물 단백질을 섭취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다. 동물 단백질을 섭취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대부분의 나라에서 개고기를 금지하고 있다. 이것은 전승해야 할 전통이 아니라 없애버려야 할 악습이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건강과 정력에 개고기가 좋다고 이야기한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은 성인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혈압과 당뇨, 비만, 심장병 등이다. 이 모든 것이 먹는 것과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오늘날 현대인은 못 먹어서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지나치게 많은 육류를 섭취함으로써 다양한 성인병으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건강을 위한다면 개고기와 같은 고지방, 고단백질을 섭취할 것이 아니라 과도한 육식을 줄여야 한다.
그리고 ‘먹는 것이 나’라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무엇을 먹느냐에 따라서 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화가 너무 많다. 이렇게 화가 많은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먹는 것이다.
평화로운 음식을 먹어야 몸이 평화로워진다. 그런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자란 고기를 많이 먹기에 화가 많아지는 것이다. 개고기에 사용되는 개들은 살아있는 순간들도 그렇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엄청난 고통을 받으며 죽어간다. 그렇게 고통이 쌓인 고기를 먹으면 내 몸에 그 만큼의 화가 누적된다. 결코 건강에 유익한 것이 아니다.
개고기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가 개인의 선택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타인의 행위를 억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른 비유를 하자면 아동을 폭행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아동을 폭행하는 것을 두고 그것은 그 사람의 가정사일 뿐이니 다른 사람들이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는 문제다.
아동들은 자기 스스로 방어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성인에 의해 폭력을 당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는 약자인 아동을 보호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개고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식용견은 사육되는 과정은 말할 것도 없고 도살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다. 약자인 개들은 인간의 폭력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다.
수요가 공급을 만든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수백만 마리의 개들이 개고기나 개소주로 사용되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개들이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시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개고기 소비이다.
이와 같이 개들이 고통을 받는 것을 뻔히 보는데 그것을 개인의 식습관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아동이 폭행을 당할 때 그 아동의 고통이 뻔히 보이는데 관여하지 말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일반인 뿐만 아니라 수의사들 중에도 많이 있다.
개고기를 먹는 수의사들도 많지만 개고기를 먹지 않더라도 개고기를 먹는 것을 타인의 식습관 정도로 생각하고 3자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 분들에게 ‘수의사에게 개라는 동물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묻고 싶다.
동물병원이나 동물보호단체와 관련된 일을 하다 보면 동물이 학대 받는 사건을 많이 접하게 된다. 이런 동물학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개고기로 사용되기 위해 사육되는 개들은 사육하는 과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운반하는 과정 그리고 도살하는 과정까지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학대행위를 받고 있다. 이러한 학대행위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다.
개고기 사육은 소비가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비와 생산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식용견이 학대를 받고 고통을 겪는 것은 사육하는 사람들의 문제이지 그 개고기를 먹는 소비자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개고기를 먹는 행위가 학대받는 식용견의 번식을 조장하는 것이다. 개고기를 먹는 행위와 식용견이 학대를 당하는 일은 무관한 일이 아니다.
동물병원에서 진료를 하면서, 학대 받은 개들을 보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그런 것과 나는 무관하다고 이야기를 하는가? 혹은 나는 동물병원에 아파서 오는 동물을 진료하는 수의사일 뿐 학대 받는 동물들에 관심을 쏟는 사람은 아니라고 하는가?
많은 수의사들 중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도 동물병원에 뜨거운 물을 뒤집어 써 등의 피부가 모두 벗겨진 고양이가 내원했다.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되면 대부분의 수의사들은 동물을 학대한 자에게 분노를 폭발한다. 그런데 개고기를 먹는 행위가 그런 학대를 조장하고 있는 일이다.
개고기와 관련해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비롯한 많은 논쟁들이 있다. 그러한 논쟁들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지만 간과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그 부분은 사육견들의 고통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일반인들은 개들의 고통쯤이야 하고 무시한다. 힘들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데 개의 고통까지 우리가 신경을 써야하느냐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일반인이기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우리는 동물의 아픔을 치료하는 수의사들이다. 그런 수의사가 동물의 고통을 무시하거나 조장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개고기 논란과 관련하여 수의사로써 고통 받는 개들을 염두에 두고 이 부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개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그 개들의 고통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편집자주 : 저자의 요청으로 ‘아동 성폭행’을 ‘아동 폭행’으로 수정하였습니다>